출퇴근하는 길목에 떡하니 자리한 터라 눈길을 돌리기 어려웠다. 진열장 앞을 서성이다 멈칫했다. 덥석 손을 대기엔 입사 3년차 월급은 턱없었다. 전세 대출금에 아파트 관리비에…. 애써 마음을 돌렸지만, 짙은 갈색의 가죽 가방은 볼 때마다 심각하게 유혹했다. 그러기를 한두 달쯤. 욕망은 없던 필요를 만들어냈다. 노트북, 읽는 책, 취재수첩, 필기도구, 연락처 수첩, 출입증 따위를 가지런하게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정장에 넥타이까지 매고 출입처를 드나드는데. 메고 다니던 가방이 유달리 꼬질꼬질해 보이던 날, 질렀다. 매장 직원은 3개월 할부 구매를 강조했다. 낭패는 바로 다음 달에 찾아왔다.
할부(割賦)는 한자 의미 그대로 ‘부담을 쪼개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 유적에서 발견된 설형문자 기록에도 할부 거래가 등장한다. 1920년대 미국에서 할부 거래는 성행했다. 당시 고가 제품이었던 라디오, 세탁기, 자동차의 할부가 유행했다. 대공황으로 ‘광란의 소비’는 막을 내렸지만.
덜컥 덤벼드는 할부는 짚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꼴이다. 핵심은 없는 필요까지 만드는 욕망과 닥칠 곤궁을 무시하는 무모함에 있다. 비상계엄령이 있던 12월 3일, 한국경제는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갚아야 할 할부 거래를 했다. 그날 밤, 역외시장에서 원화 가치는 폭락했다. 미국 포브스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입증됐다며 “계엄령 사태에 대한 대가는 5100만 한국 국민이 앞으로 나눠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계엄 사태 이전에도 한국 경제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통상환경은 더 팍팍해지고, 유일한 성장엔진인 수출도 삐걱거렸다. 미국을 중심으로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 패권주의가 확산하고 한국은 마냥 뒤처지는 중이었다. 정쟁에 휩싸인 국회는 민생 법안은커녕 반도체특별법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수 부진이 본격화하면서 성장률 하락은 불 보듯 했다. 한국은행은 2.4%로 잡았던 올해 성장률을 2.2%로 낮추기까지 했었다.
이 와중에 한국 경제의 미래를 담보로 잡은 할부 거래가 발생했다. 갚아야 할 이들은 욕망과 무모함은 하나도 없는 절대다수의 국민이다. 이미 청구서는 속속 들이닥치고 있다. 국가 리더십이 붕괴하면서 경제 외교 안보의 최전선에서 속절없이 밀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후 첫 기자회견에서 한국을 쏙 뺐다. 한국의 곤경을 활용해 더 노골적인 요구를 해올 게 뻔하다. 한은은 계엄 사태를 반영해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2.1%까지 내렸다. 대외신인도는 수직 낙하 중이다. 북유럽 국가들과 수출입 거래를 하는 한 중소기업 사장은 이렇게 푸념했다.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후 불확실성이 조금 잦아들기는 했지만, 해외에서 한국을 보는 시선은 처참하다. 계엄 직후였다. 평소 거래하던 해외 업체에서 갑자기 신용장(LC)을 개설해 주지 않았다. 우리를 오랜 내전에 빠져 있는 리비아 수준으로 여기더라.”
원·달러 환율은 1450원을 뉴노멀로 받아들일 정도다.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는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시장은 물론 금융 당국조차 당분간 환율이 예전 수준으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본다. 전문가들은 ‘L자형 장기 불황’을 우려한다. 관건은 할부대금을 갚아야 하는 기간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 정치와 분리된 채 경제는 잘 굴러간다는 걸 의도적으로라도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 정치권은 국민을 바라보고 민생을 걱정하고 있나. 정적만, 당리당략만, 표만 쳐다보는 건 아닐까. 부끄러웠던 어제를 돌아보고 극복하라고 내일이 있는 것이다. 1분, 1초가 아까울 때다.
김찬희 편집국 부국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