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정책이 바꾼 흐름… 신흥국 자본, 미국으로 떠난다

입력 2024-12-24 03:24
게티이미지뱅크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신흥국에서 빠져나간 자본이 미국을 향하고 있다. 올해 높은 경제 성장률이 전망되거나 실제 좋은 지표를 달성한 나라들에서조차 예외 없이 자본이 빠져나갔다. 지난달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이 승리한 이후 강(强)달러·고(高)관세 우려가 커지면서 신흥국 경제 불확실성이 높아진 때문이다. 신흥국에서 유출된 자본의 종착지는 미국이었다.

23일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 20일 기준 국내에서 유치된 베트남 펀드의 순자산은 1조3678억원으로 3개월 전 1조4846억원 대비 1168억원(7.9%) 감소했다. 인도 펀드도 펀드 순자산이 같은 기간 4조76억원에서 3조8628억원으로 1448억원(3.6%) 줄었다. 브라질은 416억원에서 392억원으로 감소했다.


대부분 신흥국에서 자금이 빠져나가는 반면 북미 지역만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북미 지역 펀드는 3개월 전 41조3288억원에서 46조422억원으로 불어나며 4조7134억원(11.4%)의 큰 증가 폭을 기록했다.

신흥국에서 빠져나온 돈이 북미를 향하는 것은 그만큼 수익률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지난 19일 국내 베트남 펀드는 3개월 전 대비 1.69%, 인도 펀드는 3.04%의 수익률을 낸 데 비해 북미 펀드는 같은 기간 14.39%의 수익률을 거뒀다.


북미 지역으로 자금이 몰리는 것은 국내만이 아닌 전세계적인 흐름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달 6일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되고 1주일 동안 전체 신흥국 주식 펀드에서 74억 달러(약 10조7200억원)가 유출됐다. 주간 기준으로 치면 2015년 8월 이후 9년여 만에 최대 규모다. 신흥국에서 빠진 돈은 미국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분석됐다. 같은 기간 미국 펀드에는 560억 달러(약 81조1700억원)가 유입됐다. 이는 2008년 이후 두 번째로 큰 액수다.

신흥국 자금 유출은 트럼프 2기가 강달러·고관세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신흥국의 경제 전망이 불투명해진 영향으로 보인다. 특히 트럼프 재집권 원년인 내년 미국 경제가 호실적을 보일 것으로 예측돼 ‘확실한 대안 투자처’로 평가되는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신흥국 투자에 뛰어들 유인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김근아 하나증권 연구원은 “트럼프가 강력한 관세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가운데 미국 경기는 좋은 상황”이라며 “전망이 불확실한 신흥국의 투자 매력도가 미국 대비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신흥국 자본 이탈 영향 등으로 신흥국 통화 가치도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JP모건의 신흥국 통화 지수는 지난 10월 이후 두 달 반 동안 5% 넘게 급락했다. 높은 관세가 우려되는 멕시코의 페소화 가치는 2.1% 하락했고 중국 위안화 가치는 역외시장 기준 3.7% 떨어졌다. 신흥국 자산에 대한 투자심리를 반영하는 지표로 평가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화는 이 기간 2.4% 하락했다.

특히 베트남의 경우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투자자들에게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3분기 베트남 경제는 전년 대비 7.4%의 성장률을 달성했다. 연초 베트남 정부가 목표로한 6.0~6.5%를 뛰어넘은 호실적이다. 수출 역시 호조다. 올해 3분기 누적 무역액은 5784억7000만달러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16.3% 성장했다. 수출은 2996억3000만달러로 15.4%, 수입은 2788억4000만달러로 17.3% 늘었다.

베트남의 실물 지표와 투자 전망이 엇갈리는 주된 이유는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되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지난해 기준 미국의 무역적자 3위국인 데다 중국의 우회 수출로로 활용되고 있어 중국과 같은 고관세를 적용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는 중국 수입품에 대해 60%의 관세를 매기겠다고 엄포를 놨었다. 더군다나 베트남은 경제의 수출 의존도가 높아 고관세로 인한 영향이 더욱 치명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인도 역시 올 들어 유망한 투자처로 각광받았지만 자본 유출로 돌아섰다. 인도는 3분기까지만 해도 높은 경제 성장률이 전망되며 많은 자본을 끌어들였다. 연초 2조3498억원이었던 국내 인도 펀드 순자산은 지난 9월 20일 4조76억원까지 늘어나며 9개월여 만에 1조6578억원(70.5%)을 순유입시켰다. 하지만 4분기에 들어서며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기대보다 경제 성장이 저조한 데다 트럼프까지 당선되면서 미래가 더욱 불투명해졌다는 분석이다. 인도는 지난 3분기 5.4%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인도 중앙은행(RBI)이 7% 성장을 예상했던 데 비해 낮은 성적이다. 6%가 넘는 물가상승률로 인해 기준금리가 동결돼 성장 모멘텀이 꺾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지표 움직임에 비해 신흥국 자본 유출이 과도하다는 시각도 있지만, 미국 경제가 견고한 만큼 내년까지 이 같은 흐름을 되돌리긴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3분기 미국 국내총생산(GDP) 증가율(확정치)은 3.1%로 집계됐다. 2개 분기 연속 3%를 상회하는 성적표로, 한 달 전 발표된 잠정치보다도 높아졌다.

파이낸셜타임즈(FT)에 따르면 맥쿼리의 티에리 위즈먼 글로벌 외환 전략가는 “신흥시장에서의 매도세가 미국 자산 외에는 투자 대안이 없다는 뜻의 ‘티나(TINA·There Is No Alternative)론’을 되살리고 있다”며 “요즘 경제가 탄탄하단 얘기가 나오는 신흥시장은 하나도 없다”고 평가했다.

구정하 기자 g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