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주도한 비상계엄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 장래에 대한 국제사회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근거도, 준비도 없었던 어설픈 계엄 시도는 한국의 민주주의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마지막 계엄령이 선포된 게 1979년이니 윤 대통령의 계엄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45년 전으로 후퇴시킨 것이다.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 퇴행 추세 속에서도 한국은 그동안 경제 성장과 함께 견실한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모범적 사례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윤 대통령의 무모한 계엄 시도로 빛을 잃었다.
민주주의는 한국이 가진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강력한 외교적 자산이다. 한국이 중시하는 한·미동맹은 민주주의라는 공통의 초석 위에 서 있을 때 굳건하다. 한국이 우리와 같은 처지의 유사입장 국가들과의 협력을 말할 때도 민주주의라는 공통분모가 반드시 들어간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라는 요소를 빼면 한국은 과연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
계엄 사태 이후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지속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 윤석열정부가 강조한 자유·평화·번영이라는 키워드가 허언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입각해 글로벌 중추 국가가 되겠다는 윤석열정부의 비전을 믿을 나라가 얼마나 되겠는가. 지난 3월 서울에서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한 한국이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을 세계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 계엄 사태로 한국이 외교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계엄 사태 이후 미국은 즉각 실망과 우려를 표명했다. 당장 한·미 관계 관리에 빨간불이 켜졌다. 다음달 20일 출범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우리의 우려와 어젠다를 전달할 정상외교의 골든타임을 허망하게 낭비하고 있다. 트럼프 리스크에 무방비로 부딪힐 상황이다. 일본도 비판적 평가를 하고 있다. 한·일 관계에 대한 일본 내 불안감도 커졌다. 내년 초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행사 계획도 불투명해졌고, 윤석열정부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인 한·미·일 안보 협력도 동력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도 윤 대통령 대국민 담화에서 중국인 간첩 혐의 사건과 중국산 태양광 패널 등을 거론된 데 대해 “정상적 경제·무역 협력에 먹칠하는 것”이라며 “놀랍고 불만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개선 조짐을 보이던 한·중 관계는 주중대사 교체를 앞둔 시점에서 아그레망을 받고도 대사 임명과 신임장 수여 관련 절차가 중단됐다. 심지어 계엄 사태 이후 잠잠하던 북한 매체조차 윤 대통령이 아비규환 상황을 자초했다고 비아냥대며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보도했다. 아직 도발 징후는 없지만 한국의 정치적 혼란은 북한에 위험한 불장난을 시도할 빌미를 제공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계엄 사태 이후 중요한 국가적 과제, 외교 행사도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 국방부 장관 부재로 안보 공백도 심각하다. ‘누가 대한민국을 이끄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는 불확실성이 신속히 해소돼야 국가가 정상화된다. 레임덕 정도가 아니라 데드덕 상태에 빠진 대통령이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파리드 자카리아는 국내 한 언론 기고문에서 한국의 계엄 사태와 프랑스 하원이 60여년 만에 총리·내각 불신임안을 가결한 것에는 민주주의 제도의 위기라는 공통된 테마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에서는 결과가 아닌 절차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설령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과정을 존중하는 게 민주주의다. 정치적 결과에 대한 일시적 좌절감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지속적인 제도를 포기한다면 인류가 현대사에서 달성한 가장 중요한 성취 중 하나를 잃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