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어이없이 속을 만큼, 운동 말고는 아는 게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이성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미팅이나 소개팅에 나갈 시간도 없고 그런 데 쓸 돈도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친구들이 나이트클럽에 다녀와서 열을 올리며 같이 가자고 꼬드겼지만, 골프 외에는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만큼 연습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기본 체력이 좋은 데다가 연습량까지 더해지니 성장 속도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골프를 비교적 늦게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 입문은 재수나 삼수 없이 한 번에 바로 할 수 있었다.
서울로 전학 오기 전 김재천 이사장님을 찾았을 때 그분은 나에게 충분한 지원을 약속하셨다. 나는 이것저것 묻고 약속을 받아뒀다. 이사장님은 당신이 약속한 것을 하나하나 다 지켜 주셨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지에서 믿을 사람은 이사장님밖에 없었다.
“제가 서울 오믄 밥은 먹여 주실라요. 우리 집은 나한테꺼정 돈 부쳐줄 형편이 안 되는 데라….” “오냐, 내가 다 해 줄 것이여. 걱정할 것 없다. 대신에 니는 우리 학교를 빛내 주면 돼야.” “좋습니다. 그람, 저도 믿고 오겄슴다. 제 몫은 확실하게 할 것이요.”
매번 골프채를 빌려서 연습하니까 영 불편해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이사장님을 찾아갔다. “근데 골프채가 없으니까 연습하기가 여간 불편하당게요. 이사장님이 사 주신다고 했으니, 사 주셔야지요. 누가 사 주겠습니까.” “그르냐. 그람 내가 사줄게.”
이사장님이 흔쾌히 사주신다고 했지만 차마 새것을 살 수는 없어서 발품을 팔아 중고품을 알아보고 다녔다. 여의도 63빌딩에 있는 매장에 좋은 물건이 나왔다는 정보를 입수한 나는 ‘벤 호건 아펙스’ 세트를 손에 넣었다. 중고인데도 금액이 70만원이나 했다. 학교 용품으로 산 거라 엄밀히 말하면 내 것은 아니었지만 내 손으로 길들일 수 있는 나만의 채를 가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며 감격했다. 이사장님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든든한 지원군이 돼 주셨다.
내가 전학한 한서고등학교에는 원래 골프부가 없었기에 야구부 합숙소에 한 자리를 얻어 생활했다. 처음에는 누울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해졌다. 한 팀을 강조하는 단체 생활에 나 혼자 따로 움직이자니 서로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밤에는 선배가 후배의 기강을 잡는다며 얼차려를 주거나 야구방망이를 휘두르곤 했는데 잠자리에 누워서 ‘퍽퍽’ 매 맞는 소리를 듣자니 심장이 벌렁거려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참다못한 나는 이사장님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로 결심했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