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접근권 규정을 장기간 개선 없이 방치한 정부가 장애인들에게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입법 미비로 장애인들이 편의점 등 시설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해 느꼈던 고통을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다. 정부의 입법 부작위(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대법원 판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숙연 대법관)는 19일 김모씨 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차별 구제 소송에서 정부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원심을 깨고 “정부가 김씨 등 지체장애인 원고 2명에게 인당 10만원씩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직접 판결(파기자판)했다. 소송 제기 6년8개월 만이다.
대법원은 “장애인 접근권은 비록 헌법에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라며 “정부가 개선입법 의무를 불이행해 장애인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피해를 봤다”고 지적했다.
옛 ‘장애인 등 편의법’ 시행령은 편의점 등 소규모 소매점은 바닥면적 합계 300㎡ 이상일 때만 경사로 등 설치 의무를 규정했다. 1998년 시행돼 2022년까지 24년간 유지됐다. 바닥면적 합계가 300㎡를 넘는 편의점은 불과 3%(2019년 기준)에 그쳐 장애인 접근권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1층이 있는 삶’ 소송을 시작한 김씨 등은 2018년 4월 편의점 운영사 GS리테일 및 정부 등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1심은 2022년 2월 GS리테일이 직영 편의점에 이동식 경사로 등을 구비하라고 판결했지만 정부의 손해배상 책임까지 인정하지는 않았다.
원고들은 항소했으나 2심 판단도 1심과 같았다. 1·2심 모두 입법 부작위는 인정했지만 정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정부는 1심 판결 후 2022년 4월 ‘바닥면적 합계 50㎡’로 시행령 적용 범위를 넓혔다. 대법원은 국회가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한 2008년 4월부터 시행령 범위를 넓힌 2022년 4월까지 14년을 정부가 개선 입법 의무를 방치한 기간으로 봤다.
대법원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무렵에는 장애인의 소규모 소매점에 대한 접근이 보장돼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이어 “그런데도 정부가 그로부터 14년이 넘도록 입법 의무를 불이행했다”며 “시행령 개정만으로 장애인이 그간 일상에서 겪어온 고통이 모두 회복된다거나 그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장애인 단체들이 앞서 시행령 개정을 지속적으로 요구했고,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적이 있었던 점도 근거로 꼽혔다. 대법원은 “문제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공무원들이 시행령을 장기간 방치했다”며 “국가배상법상 배상 대상인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로 법을 위반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번 판결에 따라 원고들처럼 소규모 소매점 접근에 어려움을 겪었던 다른 지체장애인들도 소송을 내면 비슷한 액수의 위자료를 받을 수 있을 전망이다. 무엇보다 정부 입법 부작위 책임이 문제가 되는 다른 영역에서도 유사한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서경환 대법관은 지난 10월 공개변론 당시 소송의 파급효과를 거론하며 “‘지체장애인 21만명에게 100만원씩 배상하면 총 2100억원이고, 국가배상 예산 3000억원에 필적한다’는 정부 측 염려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