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당신은 무엇을 읽는가

입력 2024-12-20 00:32

한강, 5·18과 4·3 다룬 소설 고통 축적한 문장으로 집필
좋은 텍스트 계속 쌓이려면 지속적으로 읽는 이가 있어야
좋은 독자가 되는 일은 우리 시대 중요한 과제다

한강 작가의 작품들을 읽었다. 정선된 단어와 압축된 문장을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고통과 아름다움을 함께 느꼈다.

300쪽 안팎의 소설을 쓰는 데 길게는 7년이 걸렸다고 한다. 한 쪽 쓰는 데 1주일 정도 걸린 속도다. 소설 한 쪽은 원고지 4매가 조금 안 된다. 계산해 보니 하루에 띄어쓰기를 포함해 160글자씩 쓴 셈이었다. 24시간의 사유와 고민을 4줄의 문장에 응축했다.

신문 문장에는 얼마의 시간이 담겨 있을까. 신문은 매일 40면 정도를 만든다. 광고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1부에 원고지 470매 안팎이 실린다. (신문 활자는 커지고 지면은 작아져 한 면 분량이 줄었다.) 2~3일 치 신문이면 장편소설 한 권 분량이다. 기자 수를 200명으로 계산하면 기자 1명당 2~3매씩 쓴 셈이다. 데스크나 편집기자 등을 빼고 취재기자만으로 따지면 5매 정도다. 취재기자 1명이 하루에 기사 한 편 정도 쓴다는 계산이다. 원고량으로는 한강 작가가 일주일 걸려도 다 못 쓸 분량을 기자는 하루 만에 써내는 셈이다. 요즘 신문, 방송 기자들은 온라인 기사도 많이 쓰니까 실제 기사 작성 분량은 더 많겠다.

한강 작가의 글이 더 뛰어나다거나 기자의 생산성이 더 높다는 식의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소설과 기사는 용도도 다르지만, 쓰는 원칙도 다르다.

원고지 5매의 기사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담겨 있다. 기자는 매일 현장에 가고, 사람을 만나고, 전화를 한다. 묻고, 듣고, 적고, 정해진 양에 맞춰 요약한다. 육하원칙에 맞춰 정확 간략 분명하게 정리하는 방식으로 기사의 형식이 발달했다.

한강 작가는 광주민주화운동과 4·3사건을 담은 두 작품을 쓰기 위해 여러 해에 걸쳐 국내외 언론 보도와 논문, 자료집을 읽었다고 했다. 시신처럼 좁은 곳에 오래 누워보기도 하고, 차가운 눈에 손을 담그기도 하며 매일처럼 울었다고 고백했다. 광주나 제주도의 기록만이 아니라 전 세계 학살 피해자의 기록을 매일 아홉 시간씩 읽었다니 그 고통을 몸에 축적하고 써 내려간 작가의 노력에 경의를 보낸다. 그는 노벨문학상 시상식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다고 고백해 온 고통이었습니다. 내가 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고통과,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느꼈다고 말하는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압축 파일을 풀면 사진이나 텍스트가 원본으로 돌아오듯 한강 작가가 작품에 응축한 당대의 진실이 독자의 읽기를 통해 다시 펼쳐져 나왔다.

한강의 작품에는 언론 보도를 비롯한 많은 텍스트가 녹아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학살 현장 발굴 사진을 실은 신문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부친의 책장에서 본 ‘광주 사진첩’은 ‘소년이 온다’를 쓰는 데 동기를 부여했다. 진실을 기억하고 증언하고 기록·보존해 온 이들의 고통과 노력이 담긴 수많은 기록을 펼쳐 읽었다니, 한 사람의 저널리스트로서 고마웠다. 이런 텍스트를 축적해 온 한국 사회도 노벨문학상 수상의 긍지를 함께 느낄 만하지 않을까 싶다.

한강의 작품이 베스트셀러다. 아무리 노벨문학상 덕분이라 해도 정직한 질문을 들고 시간과 고통을 응축해 써 내려간 문장을 읽으려는 이들이 이렇게 많다니 놀라운 일이다.

좋은 텍스트가 계속 쌓이려면 읽는 이가 있어야 한다. 한국어는 사용자가 상대적으로 적다. 좋은 독자의 존재가 더욱 소중하다. 온라인의 글과 사진도 마찬가지다. 신문사 편집국에서도 독자가 무엇을 읽는지 확인하고 후속 보도 여부를 결정하는 사례가 많다.

바야흐로 대 유튜브의 시대. 스마트폰에서 어떤 영상을 보느냐도 중요하다. 많이 본 영상을 따라 비슷한 영상들이 만들어지고 확산된다. 요즘 젊은세대들은 이성을 사귈 때 상대의 인스타그램을 들여다본다고 한다. 인스타그램 화면에 어떤 사진들이 뜨는지를 확인한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솔직한 취향이기 때문이란다.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당신이 보고 읽는 것이 당신이다’가 더 맞는 말 아닐까. 보암직한 것들만 추천하고, 음모론으로 불안과 불신을 조장하고, 전두엽이 마비되도록 욕망에 취하게 만드는 알고리즘 밖으로 나가는 일, 좋은 독자가 되는 일,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다.

김지방 디지털뉴스센터장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