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경주 (14) ‘여호와 이레’… 미리 계획된 것처럼 골프선수로 이끈 삶

입력 2024-12-20 03:07
최경주 장로가 2023년 경기도 여주시 페럼클럽에서 열린 KPGA코리안투어 현대해상 최경주인비테이셔널 2라운드 18번 홀 그린에서 신중하게 라인을 파악하고 있다. KPGA 제공

내가 서울로 전학한 다음에 고향 완도에서는 여러 일이 벌어졌다. 체육 선생님이 염려하시던 대로 완도수산고 골프부가 해체되고 추 사부님이 운영하시던 골프연습장도 문을 닫았다. 이 때문에 나만큼이나 열심히 했던 골프부 친구 박현준이 골프를 계속하지 못하고 원양어선을 탔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 현준이 생각이 난다.

‘김재천 이사장님이 연습장에 찾아왔을 때, 현준이가 같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아니, 내가 아니라 현준이만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하는 생각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그때를 돌이켜 보면 마치 누군가가 내 인생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던 것만 같다. 모든 일이 미리 계획된 것처럼 톱니바퀴가 맞물리듯이 돌아갔다. 뱃사람이 되려고 수산고에 들어갔는데 골프부가 생겼고, 꿩 사육장인 줄로만 알았던 골프연습장에서 사부님을 만났다. 사부님 덕분에 후원해 주시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김재천 이사장님을 만났다. 마치 내게 골프를 가르쳐 주려고 한동안 모였다가 흩어진 것처럼 말이다. 그 절묘한 타이밍을 생각하면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만약 골프부가 1년만 늦게 생겼더라면 나는 지금쯤 원양어선을 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2학년 때는 배 타는 실습 시간이 많아서 골프부에 지원하기 어려웠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일곱 소년의 서울 정착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완도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환경에 여간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평생 넓은 바다와 산, 들판만 보고 자란 시골 소년에게 서울은 새로운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신호등 하나 없는 시골 촌 동네에서는 차가 안 오면 건너면 됐지만 서울은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버스 지하철 타는 건 왜 이리 복잡한지, 차선은 어찌나 많은지….

유혹 거리도 많았다. 술집부터 시작해서 남자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요소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전학 간 학교에서는 야구부와 같은 숙소에서 생활했다. “야, 그래도 우리 촌놈끼리 여의도광장은 한 번 가봐야 하지 않겄냐.” 어릴 적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어서 궁금했다.

야구부 친구 중 한 명은 “경주야. 너 저 63빌딩 10층 이상 보면 돈 내야 된다. 그러니까 그 이상은 절대 보면 안 돼.” 돈을 내야 한다는 말에 겁이 난 나는 1층부터 10층까지 한 층, 한 층을 셌다. “야 이놈아 건물은 건물이지. 무슨 돈을 내냐.” 알고 보니 시골에서 왔다고 골탕 먹이려고 놀린 것이었다. 내가 너무 순수한 탓이다. 야구부 학생은 박장대소했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