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기도만 할 수 없다

입력 2024-12-21 00:38

지난 10월 27일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은 광장과 거리로 나섰다. 편향된 인권 옹호와 동성혼 합법화 움직임이라는 비상 상황에서 성경적 창조질서와 건강한 가정, 다음세대를 지키겠다는 선포와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라는 이름의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110만명이 참가했다.

이날 돋보인 것은 참가자들이 기도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수의 역차별 조장하는 차별금지법 반대’ ‘자연질서 파괴하는 성별 정정 절대 반대’ 등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사일런스 피케팅’, 이른바 침묵시위를 펼쳤다. 기도와 행동이 함께였다. 복음주의가 말하는 사회정의 실현의 한 표현이었다. 이날은 주일이었음에도 수많은 신자들이 교회당이 아니라 거리로 나왔다. 당시 기도회에서는 정치권을 향한 냉엄한 경고도 이어졌다.

반면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국교회 차원의 이 같은 기도나 행동 집회는 없었다. 동성애 합법화 우려보다 훨씬 더 위급한 반민주적, 반헌법적 국가 비상 상황에서 정작 교회는 침묵한 것이다. 10·27 집회가 보여준 결기와 간절함, 기도와 행동은 없었다. 대부분 목회자의 반응은 그저 기도하자는 것이었다. 비상계엄에 대한 비판이나 대통령을 향한 바른 소리도 미미했다. 교계 연합기관과 주요 교단, 신학교 등에서 관련 성명을 발표했지만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묻고 싶다. 기독교인은 정치 집회에 참여해서는 안 되고 기도만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어떤가. 수능을 앞둔 기독교인 수험생은 기도만 하는가. 경제적 어려움을 당한 기독교인은 그저 기도만 하는가. 신자들은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지 않고 집안에 누워 기도만 하는가. 만약 기도만 해야 했다면 지난 10월 27일은 교회 안에서 조용히 기도했어야 했다. 그런데 왜 100만명 넘는 신자들이 거리로 나왔는가. 교회는 왜 선택적으로 기도와 행동을 다루는가. 정의와 평화를 위한 노력은 신앙과 무관한 것인가.

수능을 치르는 수험생은 기도하면서 열심히 공부한다. 몸이 아픈 환자는 기도와 함께 병원 치료를 받는다. 만약 병원에 가지 않고 기도만 한다면 광신자일 가능성이 크다. 성경에도 “교회 장로를 청해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약 5:14)고 돼 있지 않은가.

이 땅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기도하시며 공생애 활동을 펼쳤다. 그는 기도와 함께 병자를 고쳤고 기도와 함께 귀신 들린 자를 자유롭게 했다. 그는 기도와 함께 죽은 자도 살렸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셨다.”(눅 4:18)

온 나라가 탄핵 정국의 격랑 속에 있다. 차제에 한국교회의 기도 내용도 바뀌길 바란다. 특히 국가 지도자에 대해 거의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위정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기도 문구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 기도문의 한계는 하나님을 모르는 위정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기에 고집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고 무속에 의지하며 유튜버들이 설파하는 사설을 따른다. 위정자들이 먼저 하나님을 믿게 해달라고 구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몰랐던 사람들을 언급한다. BC 9세기 북이스라엘 아합왕은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지독한 바알 숭배를 확산시켰다. 탐욕에 사로잡혔던 아합은 이세벨의 계략에 따라 나봇이라는 포도원 주인을 살해하고 그의 포도원을 탈취하는 악을 행함으로써 처참한 종말을 맞는다. 예수 당시 헤롯왕이나 네로황제 등도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고대 아말렉족속에 대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신 25:18)고 말한다. 그들의 최후는 종족 차원의 멸절이었다.

혼돈 속에서도 성탄은 다가온다. 메시아를 따라 우리도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구한다.

신상목 종교국 부국장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