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세상을 떠난다. 자식은 상복을 입는다. 사회 활동을 자제하며 애도를 표한다. 무려 3년이다. 부모가 자식을 품어 키운 시간이다. 이번에는 자식이 그 은혜를 갚는다. 유교에 뿌리를 두었다. 효경(孝經)과 예기(禮記)에 적힌 ‘도리’다. 탈상 3년이 지금은 3일장으로 끝난다.
성경에도 삼년상(喪)이 있다. 다윗왕은 여덟 명의 아내를 두었다. 첫아들이 암논이었다. ‘연기성(히스테리성) 인격장애’를 가졌다. 어느 날 이복동생 다말에게 몹쓸 짓을 한다. 셋째인 압살롬은 자신의 친누이를 욕보인 형 암논을 살해한다. 압살롬은 도망친다. 소식을 전해 들은 다윗왕은 통곡한다. 다윗은 죽은 암논 때문에 슬픈 나날을 보낸다.(삼하 13:36~37)
참척(慘慽)의 슬픔은 크고 길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는 살아 있어도 산목숨이 아니다. 다윗은 암논을 잃었을 때 받은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난다. 이젠 살아있는 압살롬을 보고 싶어한다.(삼하 13:39) 사건이 일어난 지 ‘세 해’째였다. 부모 삼년상이 아니라 자식 삼년상이었던 셈이다.
인생은 누구나 같은 양의 고통을 가지고 태어난다. ‘고통 총량의 법칙’이다. 슬픔에도 총량의 법칙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 문화는 잔인하다. 3일 만에 슬픔을 다 지우라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그들은 슬픔마저도 강제했다. 거세된 슬픔은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남은 자들에게 평생 멍에가 되고 또 다른 족쇄가 된다.
히브리인들의 죽은 자를 위한 애도 기간은 7일이었다.(창 50:10, 삼상 31:13) 30일간 애곡하기도 했다.(민 20:29) 그들은 충분히 울었다. 슬픔의 유통기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조선총독부의 눈물’이 아닌 자신만의 충분한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산다. 예일보고서에 의하면 애도 과정을 2년으로 본다. 유가족이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느끼기까지는 두 배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과거 삼년상은 합당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성경에는 ‘3년 탈상’만 있는 게 아니다. 성폭력 예방 수칙도 있다. 일명 ‘머데스토 선언(Modesto Manifesto)’이다. ‘그레이엄 룰’로도 불린다. 세기의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의 선언에서 시작됐다. 마이크 펜스 전 미국 부통령이 말했다. “아내가 아닌 여성과는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 이 룰의 원조는 ‘엘리사 룰’이다.(왕하 4장)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펜트하우스까지 제공하며 식사로 환대한다. 엘리사는 철두철미 수행비서 게하시를 통해 말한다. 공간의 거리를 유지한다.
예수님은 ‘잠보’였고 ‘먹보’였다. 술꾼으로도 불리었다.(눅 7:34) 1986년 갈릴리 바다에서 선체가 발견됐다. 주후 1세기 것으로 추정됐다. 길이 약 8m, 폭 2.3m, 높이 1.4m였다. 이 정도 배에 물이 가득 찼다면 잠을 잘 수 없다. 그런데 예수는 폭풍 속에서 주무셨다. 왜? 이 땅에 왕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최고의 신은 ‘잠자는 신’이다. 자신의 주권을 나타내는 표시로 잠을 잔다. 우리 속담에 ‘잠자는 사자를 누가 건드리랴’고 한다. 사자는 최상위 포식자다. 천적이 없다. 하루 평균 16~20시간 잠을 잔다. 사슴은 3~4시간, 토끼는 6~8시간이다. 늘 경계하며 잠들어야 한다. 쪽잠이고 얕잠이다.
인문학을 알고 성경을 읽으면 깨닫는 것이 있다. 성경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일상과 상식이 있다. 삶을 풍성케 하는 영혼의 양식이다. 영국의 찰스 3세 대관식 때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장이 왕에게 성경을 보여 주며 말한다.
“이 세상이 주는 것 중 여기 ‘신성한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이 국왕의 법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생생한 오라클(神託)입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 된 백성(벧전 2:9)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한 해를 돌아본다. ‘말씀을 말씀 되게’ 하지 못했던 일이 제일 마음에 걸린다. 한국교회의 보물 같은 큐티(QT)조차도 중국 식사의 디저트로 나오는 포춘쿠키는 아닐지. 요즘 젊은이들은 타로점을 성경보다 더 가까이한다. 신년에도 점집은 북적일 것이다. 이 모든 무속과 작별하는 데서 진정한 새해는 도래할 것이다. “무속 신앙 아듀~~” 아듀로 마치고 아듀로 다시 시작하자(프랑스어 아듀는 원래 ‘하나님께 맡기다’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