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경산 대추를 한 상자 보내줬다. 으슬으슬 몸살기가 올라올 때 걸쭉하게 달인 대추차만한 게 없다. 볕이 깊게 드는 거실에 종이를 깔고 앉아 수저로 생강 껍질을 쓱쓱 벗긴다. 물에 불린 생강은 부러 힘주지 않아도 껍질이 쉽게 벗겨진다. 배와 생강, 깨끗하게 씻은 대추를 한데 넣고 센불로 팔팔 끓인다.
불을 줄이고 뭉근하게 대추차를 달이는 동안, 착잡했던 지난 시간을 복기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나는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었다. 마음을 한 자리에 두지 못하고,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속보를 지켜봐야만 했다. 비상계엄이 해제되고 지난 7일, 급기야 탄핵안이 부결되자 더 이상 집에만 있을 수 없었다.
지난 14일, 많은 사람이 여의도로 국회의사당 대로로 모였다. 형형색색의 깃발과 응원봉을 들고 윤수일의 ‘아파트’, 신해철의 ‘무한궤도’, 지디의 ‘삐딱하게’ 등을 따라 불렀다. 비장하게 구호를 외치다가도, 노래가 나오면 흡사 축제를 즐기듯 흥겨웠다. 사람들이 들고 나온 깃발도 다양했다. ‘민주묘총’ ‘믹스견차별 철폐 연대’ 등 기발하고 개성 있는 깃발이 여의도 하늘 아래 나부꼈다. 그때 옆에서 구호를 외치던 어르신이 빵을 두어 개 건네줬다.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그날 나는 총부리를 겨누는 폭압을 노래로 맞서는 민주시민의 얼굴을 봤다. 그것은 개인을 뛰어넘어 공동의 자유와 존엄을 위한 외침이었다. 나이와 종교, 성별을 지우고 동등한 어깨를 겯고 나아가고자 하는 연대의 증거였다. 광장에서 평화적으로 이룩한 시위는 무해하고, 흥겹고, 성숙한 행진이었다. 마침내 국회의장이 탄핵 가결을 선포한 순간, 수많은 이들이 얼싸안으며 환호했다. 이제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헌법재판소의 시간이 시작됐다. 앞으로의 상황을 우리는 긴 호흡으로 주시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빵과 자유와 노래를 위해. 대추차를 한 모금 마신다. 뜨겁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