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 ‘예수 나를 위하여’ 144장(통144)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누가복음 9장 23절
말씀 : 세상에 평화(샬롬)가 임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된다는 게 누가의 성탄 메시지인데 그 샬롬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우리 생각을 뛰어넘는 십자가의 역설임을 살펴봤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가 그 샬롬을 누리고 확산하는 방식도 ‘십자가의 도’일 것입니다. 문제는 메시아를 바라는 우리의 시선이 연약한 아기가 누운 구유(눅 2:12)가 아니라 화려한 왕궁에 있는 강력한 황제를 향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광야로 세례 요한을 찾아간 사람들에게 혹시 권력자나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을 보러 온 건 아니었느냐고 물으십니다. 강력한 사자의 모습이 아닌 어린 양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메시아를 과연 우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일까요. 아니면 크게 실망해 우리가 원하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일까요.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 7:23)
중세교회는 십자가를 거부한 채 소위 ‘영광의 신학’을 내세웠고 종교개혁자들은 필연적으로 복음의 본질인 ‘십자가 신학’을 회복했습니다. 개혁신앙의 토대 위에 서 있다고 자부하는 오늘의 교회와 거기 속한 우리가 정말 십자가 신학을 붙들고 있는지 자문해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십자가인지 부귀영화의 현장인지 심각하게 물어야 합니다. 사람이 되어 우리 곁에 찾아오신 하나님은 십자가의 현장 즉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장애인, 노인, 무력한 자가 처한 곳에 계십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시선은 성공, 영향력, 권력 등 엉뚱한 곳을 향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헨리 나우웬은 예일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 등 엘리트 집단을 대상으로 한 ‘전략적 사역’을 떠나 캐나다의 데이브레이크(Daybreak) 공동체로 들어가 약한 자들을 섬기는 데 남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미국의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는 그의 책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에서 이 결단의 의미를 십자가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됐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를 그분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인데 도대체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 그분을 따라가야 할까요.
본문에서 주님은 십자가까지 평생 따르라고 하십니다. 주님 덕분에 세상에서 성공하는 제자가 아니라 그분처럼 자기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고(‘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모두에 기록된 몇 안 되는 구절 중 하나(막 8:34, 마 10:38, 16:24, 눅 9:23, 14:27)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제자도의 핵심 원리인 셈입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성탄 절기뿐 아니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의 생애가 되기를 빕니다.
기도 : 십자가의 길을 통해 평화와 구원을 이루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도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사랑과 섬김을 세상에 전하며 샬롬을 확산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정민영 은퇴 선교사 (전 국제위클리프 부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