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와 선교사 일제강점기 속 사역 담긴 편지 발굴

입력 2024-12-19 03:03
안의와 선교사가 1899년 대구의 거리에서 조선인을 대상으로 전도하고 있다. 채승희 교수 제공

“개정사립학교법이 지난 4월 1일자로 시행됐습니다. ‘어떤 사립학교든 정부 인가 없이 운영할 수 없다. 종교 교육과 종교 의식을 배제해야 한다.’ 조선에서 주어지는 선택지는 ‘순응해라 그렇지 않으면 문 닫아라’입니다. 탄압입니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습니다.”(1915년 7월 13일)

미국 북장로교 파송 제임스 E 아담스(한국이름 안의와·1867~1929·사진) 선교사는 아서 브라운 선교사에게 이같이 편지로 전하며 “전후 모든 상황이 저희로 하여금 끊임없이 기도하게 만든다. 어떤 수단이 됐든 간에 ‘하나님의 권능’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기독사학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는 안의와 선교사의 모습은 오늘날 종교 교육의 자율권 침해 문제로 사학법 재개정을 논의하는 한국교회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안의와 선교사의 1910년 이후 선교 활동상을 기록한 편지와 기고문 등이 새롭게 발굴·공개됐다. 1895년 6월부터 1922년 6월까지 기록된 편지에는 조선에 대한 애절한 심정이 절절히 묻어난다. 근현대사 주요사건인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 강제병합, 1919년 3·1 만세운동도 언급한다.

안의와 선교사는 1867년 미 인디애나주에서 출생해 1895년 부산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1896년 11월 대구선교 업무를 인계받고 부임과 동시에 대구·경북지방에서 최초로 설립된 남문안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했다.

길거리에서 복음을 외치며 전도했던 안의와 선교사는 교육 선교에 특화된 인물이다. 대구선교부지를 중심으로 주일학교와 소학교, 중등학교 설립을 계획했다. 1906년 그는 계성학교를 시작하면서 학생들의 교육권을 보장하고자 노력했다.

안의와 선교사는 1910년 국권침탈 당시 “일본의 점령으로 인해 나타나는 한 가지 결과로 한국인들에 대한 사업의 압박이 이전보다 훨씬 커지고 있다”며 “교회 모임에서도 그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안의와 선교사는 교육 선교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선교연합공의회 교육평의회 사무총장, 교단의 집행위원회 총무 등으로 활동하며 기독학교의 정체성을 존립하려고 노력했다.

“선교 교육은 교회 안에 기둥들을 세우는 과정입니다. 젊은이들이 가장 잠재력 높은 시기에 그들을 받아들여서 일련의 기간 동안 저희의 손으로 그들을 돌봅니다. 신앙 속에서 그들을 만들어 가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확장해 주는 것입니다.”(1913년 1월 29일)

안의와 선교사가 미국에 보낸 서신. 채승희 교수 제공

1918년 건강 악화로 사임했던 안의와 선교사는 1920년 9월 대구에 다시 돌아와 선교 활동을 재개한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건강을 회복하지 못해 곧이어 은퇴하게 된다. 이때의 감정을 편지에 담아내기도 했다.

“지난겨울에도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의사들은 내게 그곳(대구)에서의 일을 완전히 끊고, 다시 돌아갈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1922년 4월 3일)

안의와 선교사는 조선과 멀어졌지만, 복음이 꽃필 수 있도록 전 재산을 기탁해 ‘아담스복음전도재단’을 설립했다. 이는 대구에 66곳, 안동에 7곳 교회를 개척하는 계기가 된다.

이번 자료를 연구한 채승희 영남신학대 역사신학 교수는 18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그의 편지에는 한 영혼을 사랑하는 구령(救靈)의 열정이 담겨 있다”며 “한국교회에 오래도록 남을 영적 동력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