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울림’과 ‘어울림’

입력 2024-12-21 03:11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해 생각하며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잘 알지 못하고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기억해 줄 수는 없어. 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모두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겠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면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고자 하는 몸부림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여쭤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37절)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 없는 신앙생활은 무미건조한 종교생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대표적인 방법은 온전한 예배자가 돼 말씀을 통해 심령의 울림을 받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울림의 사전적 의미는 ‘소리가 무엇에 부딪혀 되울려 나오는 현상 또는 그 소리’를 의미합니다. 산 정상에서 소리치면 울려 퍼져 가던 소리가 절벽에 부딪혀 되울리는 것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가운데 울림으로 임하고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것입니다.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으며 손과 발로 이루어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는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38절) 예수께서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이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울림’이 ‘어울림’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요 3:16) 나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조차도 사랑하셨습니다.

영국의 변증가이자 영문학자인 C S 루이스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와 성격이 잘 맞는지, 나에게 잘 해 주는지, 나에게 유익한 사람인지 따지기 전에 하나님이 허락한 이웃이라면 의지를 가지고 사랑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한 사랑은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전제 조건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때로는 스스로 학대하고 자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시야로 자신을 바라보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버리고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 자신을 정죄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십자가 처형에 앞서 배신하고 도망간 것을 아셨지만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부족해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끝까지 사랑하고 믿어주시기 때문에 자신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울림’이 ‘어울림’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해 줄 것입니다.

황성재 주신교회 목사

◇주신교회는 발달장애인의 삶의 공간을 위해 보냄을 받은 선교적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아임히얼발달심리센터’를 두고 있으며 장애인 자녀를 둔 부부 상담, 개인 상담, 미술치료 등을 통해 발달장애인 가정과 함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