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무(無) 속에 계신 창조자 하나님은 절대 주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나는 나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름 없는 분이고 그저 ‘나’로서 있는 분입니다. “나는 나다”라고 말한 것은 절대 자유로운 주체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절대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면 창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과 역사를 창조하려면 절대 자유로운 주체 ‘나’에 이르러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입니까. “나는 나다”라고 하는 절대 자유의 주체가 하나님의 형상, 참모습입니다. 사람에게 관상과 심상이 있다고 하는데 관상과 심상보다 더 깊은 곳에 하나님의 형상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관상이나 심상보다 한없이 크고 깊어서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도가 높은 선생님이 있었는데 제자들이 와서 말했습니다. “이 고을에 아주 신통한 이가 왔는데, 사람들의 얼굴만 보면 사람들의 운명을 귀신처럼 알아맞힙니다.” 관상쟁이에게 미혹 당한 제자들을 보자 선생이 “관상쟁이를 불러와 내 관상을 보게 하라”고 했습니다. 관상쟁이가 선생의 관상을 보더니 아무 말 않고 근심에 차서 나갔습니다. 제자들은 “왜 그러냐. 우리 선생님 관상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큰일 났다. 너희 선생은 사흘 안에 죽는다”고 답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을 선생에게 전하자 선생은 “그 관상쟁이한테 내 관상을 다시 보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관상쟁이가 다시 보고는 기뻐하며 “너희 선생님이 돌아가시지는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선생이 또다시 관상을 보게 했더니 이번에는 당황하면서 달아났습니다.
제자들이 쫓아가 “이번에는 왜 그러시오” 하고 물었더니 관상쟁이는 말했습니다. “너희 선생은 도대체 관상을 볼 수가 없다. 볼 때마다 관상이 달라진다. 처음엔 얼굴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해 곧 죽겠다고 했고, 두 번째는 죽음의 기운이 휘도는 가운데 생기가 살아서 살겠다고 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죽음의 기운과 생기가 뒤죽박죽 휘돌고 있어 관상을 볼 수가 없다.”
제자들이 선생님께 와서 관상쟁이의 말을 전하니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상이라는 것은 얼굴에 나타난 기의 흐름을 보는 것인데 나는 내 속의 기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죽음의 기운을 펼쳐 보였고 다음에는 생기가 조금 움직이게 했고 그다음에는 죽음의 기운과 생기가 함께 휘돌게 했다.”
관상보다 깊고 큰 것이 심상이라고 합니다. 관상이 아무리 나빠도 심상이 좋으면 좋다고 합니다. 심상보다 더 깊고 큰 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사람의 속에는 물질의 세계를 초월한 태초의 깊이가 있고 그 무한한 깊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만일 사람 속을 다 들여다보고 다 알았다고 하면 우정이나 사랑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 철학가 유영모 선생은 “사람의 얼굴이 한없이 깊다. 우주보다 깊다”고 했습니다. “나는 나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없음’에서만 드러나고 완성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나’,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있습니다.
박재순 목사 (씨알사상연구소 소장)
◇박재순 목사는 서울대(철학과)와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성공회대 겸임교수와 한신대 교수를 거쳐 현재 씨알사상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