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계엄 사태가 드러낸 것들

입력 2024-12-19 00:38

지난 3일 심야에 선포된 비상계엄은 지나치게 황당하고 지나치게 위험했다. 그래서 비현실적이었다. 검사 출신 대통령의 망상은 역사 속에 박제된 줄 알았던 계엄이나 내란을 2024년의 현실로 불러냈다. 다들 “미쳤다”고 비명을 질렀고, 여의도로 몰려가 “탄핵”을 외쳤다. 14일 저녁 국회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하고 난 뒤에야 사람들은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2024년 12월의 계엄 사태는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시험이기도 했다. 계엄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튼튼하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국민들은 계엄에 맞서 신속하고 단호하면서도 성숙한 저항을 보여줬다. 외국 언론들은 ‘민주주의 회복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한국의 민주주의 역량에 감탄했다. 한국 정치가 그리 우수하진 않더라도 비관적이지 않은 것은 시민들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가 진창에 빠질 때마다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정치를 구출했다. 이런 시민성과 역사가 젊은세대로 이어지고 있음도 이번에 확인했다.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응원봉을 들고나와 K팝 노래를 부르며 “탄핵”을 외치는 젊은세대의 모습은 한국 민주주의가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었다. 이 젊은세대 그리고 이들과 함께 진화하는 K민주주의를 기성 정치가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하지만 현행 대통령제가 가진 치명적 위험성도 발견됐다. 이번 비상계엄은 현직 대통령에 의해 재임 도중 선포됐다.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비상계엄을 실행할 경우 이를 막기 어렵다는 문제가 노출됐다. 대통령은 “도대체 두 시간짜리 내란이 있느냐”며 “고도의 통치행위”라고 주장하지만 국민들과 국회는 이번 계엄 사태를 내란으로 규정하고 대통령의 업무를 정지시켰다.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단이 남아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가 한 명의 이상한 대통령에 의해 언제든 중단될 수 있다는 것, 대통령이 명령하면 군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민간인에게 총을 들이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됐다. 대통령제가 가진 이 위험을 어떤 방식으로든 제거해야 한다. 군에 대한 지휘권도 대통령 1인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견제하고 분산할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계엄 사태 속에서 미국이 일관되게 비판적 메시지를 발신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미국은 한·미동맹이 ‘민주주의 동맹’이라는 점을 거듭해서 강조했다. 한국 보수세력이 그토록 강조하는 한·미동맹은 반공, 반북, 반중만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다. 한·미동맹의 토대가 민주주의라는 점은 중요하게 인식돼야 한다. 윤석열정부가 공들여온 한·일 관계 역시 민주주의라는 공통점이 없다면 지속되기 어렵다. 일본 주요 신문들은 탄핵 이후 한·일 관계가 다시 겨울을 맞게 될 수 있다고 걱정하면서도 탄핵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논평했다.

국민의힘은 이번 사태 속에서 극우 본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들은 한국 보수를 대표하는 정당으로 자임해 왔으나 아니었다. 탄핵은 진보 보수를 넘어선 압도적 국민의 요구였으나 그들은 10% 극우의 편에 섰다. 그들이 입버릇처럼 말해온 자유민주주의도 가짜였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짓밟히는 데도 국민의힘 당론은 탄핵 반대였다. 그들은 위헌적 비상계엄을 해제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 내란죄 피의자를 여전히 엄호하면서 국민의 뜻을 받들었던 일부 의원들마저 내몰고 있다. 국민의힘은 민주주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헌법과 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정당의 신념을 보여주지 못했다. 어쩌면 그동안 숨겨놨던 과거 독재정권과 이어진 오래된 뿌리마저 노출한 것인지 모르겠다.

김남중 국제부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