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꼬실라 하지 말고 보내주쇼.” “그라믄 경주야 완도에 유지들 잘 아는 고모도 있고 하니 우리가 교육청에 손 닿는 데도 있고 잘 풀어보자.” “야 이놈아 우째 한 번에 그렇게 가냐. 그래도 사람이 인정이 있고 의리가 있는 건데 어떻게 니 좋다고 그냥 다 때려치고 가냐.”
집안 어르신들은 나를 설득하기 위해 한 마디씩 거드셨다. 이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큰아버지가 나한테 왜 서울에 가려고 하는지 물으셨다. “경주야, 완도에 있으면 다 괜찮을 긴데 니 얘기 좀 해봐라.” “큰아부지, 완도에는 나한테 맞는 골프장이 없당게요. 이건 현실이제. 아니 골프 선수를 할라믄 훈련을 할 수 있는 조건은 갖춰져야 하는 거 아닌교. 라운드 돌 수 있는 골프장도 필요하고 그런데 완도에는 없어유. 서울에는 사람이 많은데 선수는 경쟁해야지 성장한당게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 주장을 펼쳤다. “농사도 마찬가지로 여기서 자그맣게 하니까 모르지. 나주나 저기 가보쇼. 우리가 하는 농사가 그게 농사여. 거기는 평야도 있어.” 내 얘기를 집중해서 듣던 어르신들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에 성공한 것이다. “경주 말이 맞네. 형님 이거 빨리 방법을 찾아봅시다.”
이 기간 나는 골프 연습장도 갈 수 없어 신지도행 배를 타고 명사십리를 찾곤 했다. 그곳에서 온종일 혼자 샷 연습을 하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학교도 시끌시끌했다.
얼마 후 도저히 나를 설득할 수 없겠다고 판단 내린 학교는 전학에 필요한 서류를 내줬다. 결국 2월에 전학하기로 학교와 합의를 봤다. 드디어 서울행이 확정됐다. 1987년의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와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아버지는 앞으로 내가 지내게 될 숙소를 둘러보고 그날 밤 같이 주무셨다. “밥 잘 챙겨 묵고, 어데 아프지 말고. 알았냐.” 아버지는 같은 말을 하고 또 하셨다. 농사일, 물일을 함께했던 장남이 듣도 보도 못한 골프에 미쳐서 저 혼자 서울 가겠다고 난리를 치니 괘씸하기도 하셨을 텐데 섭섭하다는 말씀 한마디 없으셨다.
다음 날, 터벅터벅 걸어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아려 왔다. 아버지의 크고 넓은 어깨가 문득 너무 작고 좁아 보였기 때문이다. 울컥하는 순간 조금씩 흔들리는 아버지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쇼. 내가 알아서 잘할게라.” 1분 1초도 허투루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만약에 완도에 계속 있었다면 어찌어찌 선수가 됐더라도, 지금의 최경주가 되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