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방송·문화] 극한의 분열과 실종된 정치, 그 끝은 참혹한 내전

입력 2024-12-18 00:00 수정 2024-12-18 00:00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는 정치와 타협이 사라지면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보여준다. 군은 민간을 상대로 공격을 하고, 미국인들은 분리독립을 하겠다며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다. 마인드마크 제공

“그래서 어느 쪽 미국인?”

무장한 군인에게 납치당한 동료들을 구하러 간 기자 조엘(와그너 모라)이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우리도 미국인”이라고 말하자 군인이 되묻는다. 다양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온 미국은 사라졌다. 캘리포니아주와 텍사스주를 주축으로 한 서부군과 나머지 19개 주가 뭉친 플로리다 동맹이 분리독립을 추진하며 내전이 벌어진 미국엔 차별과 혐오만이 가득하다.

수도 워싱턴 D.C.로 대통령을 인터뷰하러 가겠다는 조엘과 리(커스틴 던스트)에게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기자 새미(스티븐 헨더슨)는 “워싱턴에선 기자들을 총살한다. 정부군이 (기자도) 적군 취급한다”고 말한다. 대통령은 3연임을 이어가는 동안 미 연방수사국(FBI)을 해체했고, 군부는 민간인을 상대로 공습을 자행한다.

사명감을 가지고 종군 기자로 활약해 온 리는 전장에서 살아남아 사진을 보도할 때마다 이 나라에 ‘경고’를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은 이 꼴이 났다. 극단적 분열로 역사상 최악의 내전이 벌어졌고, 연방 정부의 무차별 폭격과 서로를 향한 총탄이 빗발친다.

혼란에 빠진 미국을 그린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포스터)가 오는 31일 개봉한다. 디스토피아적 상상에서 시작된 이야기지만 영화에 그려진 사실상의 계엄과 무정부 상황은 최근 비상계엄과 탄핵 사태를 겪은 국내 관객들에게 시의적절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영화는 조엘과 리, 새미 그리고 사진기자 지망생 제시(케일리 스페니)가 워싱턴 D.C.까지 가는 1379㎞의 여정을 로드무비 같은 구성을 취하면서 전쟁의 공포를 가감 없이 담아낸다.

‘시빌 워’는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비롯해 ‘패스트 라이브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미나리’ 등의 영화와 드라마 ‘성난 사람들’을 만든 A24의 첫 블록버스터다. 영화는 이전의 전쟁 영화와는 다른 결의 시청각적 경험으로 몰입감을 선사한다.

총탄 소리와 인물들의 심장 박동 소리 등 긴장과 공포를 표현하는 다양한 요소를 활용해 디자인한 음향은 관객들을 그야말로 멱살 잡고 전쟁터로 끌어들인다. 그러면서도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한다. 카메라는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터지며, 누군가 피 흘리며 쓰러지는 현장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배우들은 기자라는 직업인뿐만 아니라 전쟁터에 던져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느끼는 공포감을 현실적으로 연기했다. 커스틴 던스트는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지키는 강한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를 통해 관객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할리우드의 라이징 스타 케일리 스패니는 위기 속에서 점점 더 단단해지는 열정 가득한 제시를 그려냈다.

영화를 연출한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영국의 소설가, 각본가 겸 영화감독이다. 대니 보일 감독이 그의 소설 ‘비치’(1996)를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동명 영화로 만들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보일 감독이 만든 ‘28일 후’(2002), ‘선샤인’(2007)의 각본을 맡았고, ‘엑스 마키나’(2015)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러닝타임 109분, 15세 이상 관람가.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