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이란 역사적 비극 속에
흥겹고 절제된 젊은 시위대
문화적 자유로의 전환 이뤄
흥겹고 절제된 젊은 시위대
문화적 자유로의 전환 이뤄
2024년 12월, 대한민국은 깊은 우울의 늪에 빠져들었다. 시국의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함이 아니다.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느닷없음은 결국 8년 만의 탄핵심판 돌입이라는 역사의 비극, 국가의 비극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앞으로 행보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아무도 모른다. 한 치 앞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역사이며, 더욱이 격동의 세월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대한민국 근현대사 아니던가. 이를 어쩔 수 없는 체념이 아닌 격변하는 시대, 민주주의의 자정력 증강으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과정이라 수용한다 하더라도 시대의 격변이 남긴 상흔은 도리 없이 큰 상흔으로 비화하는데, 바로 시대의 우울을 낳는 것이다.
결국 시대를 살아내는 건 소수의 사회 지도층이 아니다. 그들이 정해놓은 방향을 견디고 받아들여야 할 다수의 국민이다. 헌법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조항은 그저 주어진 상투적 구호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주권이 다수 국민의 몫이란 사실의 강조이며 동시에 그렇게 주어진 권력으로 대표되는 시대를 살아내는 몫 또한 다수의 국민이란 사실이다. 작금의 시대는 분명 우리에게 우울의 징후로 각인된다. 우리 민주주의가 이처럼 허약했는가에 관한 반성에서부터 지도층을 향한 최소 기대조차 무너져내리는 현실을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전제로 작동해야 할 분명한 지침조차 부재한 상태의 허무가 시대의 우울로 발전된 것이다.
그런데 8년 전의 탄핵 정황, 그때 보여준 촛불의 성숙함에 더해져 이번 12월에 보여준 다수 국민의 민주주의가 보여주는 한 현상이 주목할 시사점을 말해준다. 시대의 우울을 시대의 자유로 전환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보였다는 점이 그렇다.
새로운 시도의 핵심은 달라진 시위 문화다. 10대, 20대의 적극적인 시위 참여 자체도 주목할 점이지만 계엄 행위에 관한 규탄, 탄핵에 관한 의견 개진이란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진중한 주제를 대하는 이들의 방식에 숨이 가쁜 신명이 담겨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전투적 구호와 민중가요를 목청껏 소리쳐 부르던 절망의 포효가 축소된 자리를 트렌디한 아이돌 그룹의 노래 가사를 패러디해 부르는 흥겨움이 대신했다. 절규의 외침과 뒤를 돌아보지 않는 비장미를 담은 투쟁의 자리에 마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흥겨운 외침이 대신 들어섰다. 오늘의 시위 현장은 마치 축제의 한 자리를 연상케 하는 고조된 자유의 흥분이 본격화됐다.
하지만 이 자유가 방종과 혼란의 아우성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점은 새로운 시위 문화가 여전히 지켜나가는 민주사회의 전통적 모습을 닮았다. 경찰 측 추산 10만명 넘게 운집했던 여의도 국회 주변의 시위 현장은 외신에서도 주목할 정도로 폐회 이후 깔끔하게 정돈된 풍경이 주목을 받았다. 수만명이 소리치고, 도로를 행진하고, 자칫 잘못하면 격렬한 대치 상태를 일으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시위 참가자들은 자율적 연대를 통해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는 성숙한 시위 문화를 보여줬다. 게다가 기존 집회가 벌어지면 차갑게 가라앉던 주변 상권의 활성화를 위해 집회 미참석자들이 커피, 김밥 기부 릴레이 같은 시도를 통해 12월의 추위를 달래고 즐거운 시위에 동참할 수 있게 지원하는 시도를 실시간 SNS를 통해 소통하는 모습은 이른바 K시위 문화의 모범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엄중한 시국 현실을 외면한 채 즐거운 잔치와 이벤트의 하나로만 시위를 소비한다는 지적도 있다. 당연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오늘의 흐름에 주목해야 하는 건 시대정신이 변화하고 있다는 징후에 관한 정확한 인지다.
시대의 오늘은 분명 우울하다. 하지만 진화한 시위 문화는 시대의 우울을 시대의 자유로 과감히 전환하고자 한다. 우울의 정서를 심화하는 방식이 아닌 문화적 자유, 민주주의 연대를 지향하는 자유로의 전환으로 말이다. 이제 이러한 자유의 외침에 사회 지도층이 응답할 차례다.
주원규 소설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