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5월 광주, 12월 서울, 그리고 한강의 질문

입력 2024-12-18 00:50

대한민국 민주주의 회복력은
진심과 용기 있는 시민들 덕분

소녀들에게 응원봉은 특별해
선결제는 광주 주먹밥과 닮아

80년 5월이 2024년 12월 구해
우리는 광주에 큰 빚을 졌다

2024년 12월 대한민국은 계엄의 공포와 탄핵의 안도가 뒤섞인 혼돈의 시간이었다. 같은 기간 스웨덴에서는 한강 작가가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역사에 기록될 이 두 사건, 계엄과 노벨상은 묘하게 맞닿아 있다. 노벨문학상위원회는 이렇게 말했다. “올해 노벨문학상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배경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깊게 탐구한 작가에게 수여됐습니다. 책의 내용이 현실이 된 한국에 노벨상이 힘이 되길 바랍니다.”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 작가의 시상식을 일주일 앞두고, 한국에서 또다시 계엄령이 내려졌으니 이보다 더 시의적절한 노벨상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현지에서 작가를 향한 첫 질문은 문학이 아닌 한국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한강은 “맨몸으로 무장한 군인들을 껴안으며 제지하려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진심과 용기가 느껴졌다”고 했다.

한강은 열두 살에 우연히 ‘광주 사진첩’을 보고,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을 던졌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1980년 5월의 광주. 한쪽에선 군인들이 무고한 민간인에게 총을 쏘고, 한편에선 사람들이 총상자에게 수혈하기 위해 병원 앞에 긴 줄을 늘어섰다. 44년이 흘러 계엄이 선포된 지난 3일 밤, 무작정 국회로 달려온 이들은 80년 광주의 봄을 겪었거나, 계엄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우발적인 총격으로 사상자가 나올 수도 있었던 일촉즉발의 상황. “군이 발포하면 우리가 맨 앞줄에 서자”는 이들이 있었고, 무장한 군인에게 돌아가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때문에 명령을 받고 출동한 군인과 경찰도 소극적으로 명령을 따랐다. 그들의 소극적인 행위가 결과적으로 적극적인 민주주의 수호라는 결과를 이끌어낸 셈이다.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의 답은 바로 용기 있는 시민이 있어서였다. 80년 광주에서도 지금 서울에서도. 이들 덕분에 국회의원들은 담을 넘어 들어가 계엄 해제 투표를 할 수 있었고, 계엄은 6시간 만에 정리됐다. 세계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보여준 것은 옳은 일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국민들 덕분이었다.

이후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까지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와 힘을 보탰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이들은 꺼지기 쉬운 촛불 대신 어두울수록 더 빛나는 K팝 아이돌 응원봉을 들었다. 소녀들에게 응원봉은 자신이 가진 가장 빛나고 소중한 것이다. 그들에게 약 5만원은 적지 않은 금액이다. 소녀들에게 응원봉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쏟아부어 누군가를 사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걸 들고나왔다는 것은 시위에 그만큼 진심이고 진정성이 있다는 뜻이다.

형형색색 빛나는 야광 응원봉이 중심이 되면서 시위는 자연스레 평화롭게 진행됐다. 로제의 ‘아파트’와 윤수일의 ‘아파트’가 만나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와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만났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캐럴 가사를 개사한 곡도 흘러나왔다. 야외 콘서트 같은 분위기의 K시위에 외신은 “응원봉이 비폭력·연대의 상징이 되었다”며 찬사를 보냈다. 시위가 열리는 인근 카페와 식당에는 집회 참여자를 위한 선결제 행렬이 이어졌는데, 80년 5월 광주의 어머니들이 시위대에 나눠주던 주먹밥과 닮았다.

14일 차가운 아스팔트에 앉아 전광판을 통해 국회 상황을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은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연설을 통해 한강을 다시 만났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한강의 질문에 우리는 이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1980년 5월이 2024년 12월을 구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광주에 큰 빚을 졌다.

탄핵안은 가결됐으나 끝난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이 남아 있다. 계엄을 단행한 대통령을 탄핵하자는 표결에 반대한 85표가 있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년이 온다’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2024년 계엄과 탄핵의 역사는 대한민국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갈까. 부디 밝은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길 바란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