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연금·노동·교육 ‘4대 개혁’ 과제 좌초 위기

입력 2024-12-17 00:00 수정 2024-12-17 00:00
12·3 비상계엄 사태 여파로 윤석열정부 핵심 과제인 ‘의료·연금·노동·교육’ 4대 개혁이 좌초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의료계에선 의료개혁 과제의 원점 재검토 주장이 커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7월 14일 한 의료진이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의 텅 빈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 윤웅 기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면서 의료·연금·노동·교육 등 ‘4대 개혁’ 과제들이 좌초 위기에 놓였다. 특히 윤 대통령이 강력한 추진 의지를 보였던 의료개혁은 한층 커진 의료계 반발에 후속 과제들이 줄줄이 지연되는 모습이다.

16일 의료계 등에 따르면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 산하 전문위원회 회의는 추후 일정을 잡지 못한 채 일정을 연기했다. 특위는 연내 비급여·실손보험 개선, 의료사고 대응 강화를 위한 개혁 작업도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당장 발표 일정을 잡지 못한 상태다. 오는 19일로 예정됐던 공청회 개최도 불투명해졌다.

특위 한 위원은 “특위 과제들은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추진해 왔는데, 그 결정이 불확실해졌다”고 말했다. 또 다른 특위 위원도 “현재 상태에서 논의해서 발표한다고 해도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의료계가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의료계는 12·3 비상계엄 사태와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의대 증원을 포함한 모든 의료개혁 과제의 원점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당시 계엄사령부 포고령에 ‘전공의 등 의료인 미복귀 시 처단’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면서 의료계 반발은 거세졌다.

2025학년도 대학 입시 절차가 진행 중이지만 의료계는 의대 증원 재검토 목소리를 더 키우고 있다. 전국의과대학교수 비상대책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윤석열의 ‘사이비 의료개혁’을 중지시키고, 의대 증원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현 사태를 수습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의대가 설치된 대학 총장을 향해서도 “대학별 교육 여건과 상황을 고려한 감원 선발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수시 인원을 정시로 이월하지 않거나, 공고한 정시 모집 인원을 대학이 자체적으로 줄여서 선발하라는 것이다.

교육계에서는 의대 증원이 2025학년도에 한정된 ‘일회성 이벤트’에 그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교육부는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2025학년도는 변동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못 박았다. 하지만 교육계 한 관계자는 “정부가 2026학년도는 증원 규모를 열어놓고는 있었으나 탄핵 정국으로 동력이 아예 꺾인 듯하다”고 말했다.

27년 만에 이뤄진 의대 증원 등 의료개혁이 무산돼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회정책국장은 “필수·지역 의료가 붕괴해 있는 상황이었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왔던 것”이라며 “의사 수를 확충하면서 의료체계까지 바꾸려는 것이었는데, 이 개혁이 그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앞으로 의료체계는 완전히 붕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의개특위 산하 필수의료·공정보상 전문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은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부 교수도 “지금 개혁이 중단되면 다음 정부, 그리고 그다음 정부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라며 “그동안 합의가 됐던 의제만이라도 변동 없이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금개혁 역시 국회 논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개혁 작업이 지지부진해졌다. 앞서 정부는 지난 9월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42% 등 모수 개혁을 포함한 정부안을 발표했다. 2003년 이후 21년 만에 내놓은 단일안이었다. 하지만 국회 논의는 표류하고 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개혁이 지연될수록 기금 고갈에 대한 부담은 더 커지기 때문에 보험료율 인상 폭이 더 가중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노동개혁 정책도 ‘올스톱’ 상태다. 올해 들어 윤 대통령이 새롭게 내세운 과제는 노동 약자 지원이다.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에 있는 플랫폼노동자나 특수형태근로종사자,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 등을 ‘노동 약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 재정 사업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노동계와 야당은 노동 약자를 별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의 인정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입장이다. 탄핵 정국 속에서 해당 법안 논의가 진전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연금개혁과 함께 불붙기 시작한 ‘계속 고용’ 논의도 속도 조절이 불가피해졌다. 정년연장을 포함한 계속 고용 방안은 지난 6월부터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의 노·사·정 사회적 대화 의제로 다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계엄 사태 이후 한국노총이 사회적 대화 불참을 선언하며 대국민 토론회를 포함한 공론화 작업이 기약 없이 미뤄졌다.

노동계와 경영계는 급속한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계속 고용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사회적 의제에 대한 노총의 입장을 어떤 방식으로 전할지 논의 중”이라며 “올해 안으로 입장을 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부가 학교 수업 혁신을 위해 추진해오던 ‘인공지능(AI) 디지털 교과서’는 교과서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국회 교육위가 AI 교과서를 학교 현장에서 꼭 써야 하는 교과서가 아닌 학교·교사 선택에 맡기는 ‘교육자료’로 규정하는 법안을 야당 주도로 통과시켰다. 국회 법제사법위를 거쳐 본회의까지 통과하면 교과서 지위는 박탈된다.

정부가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인 유보통합(유치원·어린이집 통합)도 난관에 빠졌다. 유보통합은 시·도교육청과 지자체, 유치원과 어린이집 등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꼬여 있는 사안이다. 이날 한국교원대에서 예정됐던 유보통합 공청회는 어린이집 단체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애초 이달 중 정부의 통합 방안이 나올 예정이었지만 내년 초로 미뤄졌다.

김유나 이정헌 기자,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세종=박상은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