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지혜란 무엇인가

입력 2024-12-17 00:23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의 고유명사와 같은 ‘솔로몬’의 서사를 통해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그의 출발은 초라했다. 위대한 ‘이스라엘의 별’ 다윗의 후계자 자리는 유독 무거웠다. 또한 약관의 그에게는 세력도 정통성도 부재했다. 위로는 형제들이 많았고 그의 어머니는 그릇된 첩 밧세바였다. 다윗의 왕권 아래 그나마 봉합돼 있던 이스라엘은 언제든 분열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그가 붙잡은 것은 하나님이었다. 그는 ‘일천 번제’를 감행했다.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도 철 지난 논쟁이 있지만, 가장 문제가 된 건 그가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은 토착 신앙과 연관된 산당이 아닌, 법궤가 있는 곳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그는 기브온 산당으로 간 이유를 ‘제일 유명한 산당이 있었으므로’(왕상 3:4)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산당 자체도 잘못됐지만, 그곳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좋아서였음이 암시됐다는 점이 더욱 그렇다. 뭔가 잘못됐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원하는 것을 물으신다. 물론 본문은 이 응답이 솔로몬 자신의 열심 때문이 아닌, 그의 아버지 다윗과 하나님께서 맺은 언약 때문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주목할 것은 솔로몬이 무엇을 구했느냐다. 과거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그가 구한 것을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번역해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다고 전했지만, 개역개정 성경은 ‘듣는 마음’을 구했다고 정확히 직역한다. 이는 ‘순종하는 마음’이라는 용례로도 쓰인다. 여기서 결론은 확고하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한 적이 없다. 그저 ‘듣는 마음’을 구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 중의적 의미가 숨어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말을 듣는다는 중의적 의미이자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이에 순종하는 마음이라는 의미다.

참으로 좋은 구함이다. 그가 구한 ‘듣는 마음’은 사욕과는 무관하다. 나아가 고대 전제 왕정에서 그 어떤 왕이 백성들의 말을 듣고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을 달라고 구했던가.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마음에 들어 하셨고, 그의 원대로 ‘듣는 마음’을 주셨다. 이게 끝이 아니다. 그가 구하지도 않은 것들, 즉 부귀영화와 총명함을 주셨다. 전에도 후에도 이런 지혜로운 자는 없게 하신다고 선언하셨고, 그 약속은 이루어졌다.

이처럼 솔로몬은 초인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이미 지혜로웠다. 지도자로서 만약 단 하나의 덕목만을 골라야 한다면 반드시 취해야만 하는 덕목이 ‘듣는 마음’임을 간파했고, 바로 그 하나만을 구했다. 이런 일화를 통해 성경은 통치의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동시에 인간, 특별히 지도자가 구해야 할 지혜가 과연 무엇인지를 빗대어 가르친다. 바로 듣는 마음이다.

나라가 혼란스럽다. 이 혼란 역시 결국 듣는 마음, 즉 지혜의 부재 때문이다. 지도자는 권력이 커질수록 왕적 자의식에 갇혀 점점 더 안 듣게 되고, 반대로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자들로만 둘러싸인다. 즉 지혜의 반비례라는 구조적 문제가 있는 자리다. 그래서 어떻게든 들으려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 위정자들은 분명히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민주주의 주권의 근간인 국민의 이야기를 놓치고 그릇된 아집과 진영논리에 매몰되는 순간 거센 저항과 자멸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말하지 않는 국민은 없다. 그저 듣지 않는 지도자들만 있을 뿐이다.

다시 솔로몬이다. 초년과 달리 그의 말년이 허망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총명’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명민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말년의 그는 하나님의 말씀도, 백성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빗발치는 상소와 간언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세금과 병역을 백성에게 지우고 홀로 호의호식했을 뿐이다. 지혜란 무엇인가. 다시 한번 묻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손성찬 목사(이음숲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