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87년 헌법’ 체제 극복을 위한 개헌

입력 2024-12-17 00:31

2024년 12월 3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발령으로 온 국민은 밤잠을 설쳤다. 45년 만에 발령된 계엄은 ‘87년 헌법’ 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온 이 헌법은 전혀 예기치 못한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면서 천명을 다하고 있다.

그간 한국 민주주의의 파탄은 헌법의 불안정으로 표출됐다. 1948년 제헌 이후 9개의 헌법이 명멸해갔다. 산업화 과정에서 처절하게 부르짖은 민주화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쟁취로 외형적 성공을 이루었다. 대통령 5년 단임제에서 네 번의 평화적 정권교체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공을 알리는 상징적 징표다. 하지만 민주헌법에 따라 작동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요원하다. 민주화의 화신인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대통령이 임기 말에 이르러 가족과 측근의 비리로 불행을 자초했다. 민주화의 외피를 입은 권위주의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제도보다 인격화된 권력의 상징조작 속에 제왕적 대통령에 안주한 결과다.

이제 참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38년에 이르는 헌법의 안정 속에 새 헌법을 모색할 때가 됐다. 사실 87년 헌법은 여야 8인 정치회담이 직선제 쟁취에 매몰된 나머지 헌법의 체계정합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서둘러 만든 결과 근본적인 흠결을 안고 있다. 예컨대 1971년 위헌판결을 받은 국가배상법의 군인·군무원에 대한 이중배상 금지 조항은 유신헌법에 포섭돼 5공 헌법을 거쳐 현행 헌법에 그대로 존치한다. 유명무실하던 헌법위원회에 헌법재판소를 대체해 대법원의 갈등과 긴장 관계가 지속된다.

무엇보다 세계는 급변한다. 민주화, 정보화, 세계화, 지방화란 시대적 화두에 부응하는 헌법이 필요한 때다. 미래 한국의 백년대계를 설계하는 국민의 장전으로서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에 따라 인공지능(AI)이 인간을 대체하는 상황이다. 정보혁명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정보기본권을 보장하는 헌법이어야 한다. 한반도라는 울타리에 갇힌 헌법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헌법이어야 통일시대에 능동적으로 부응할 수 있다. 이미 도래한 다문화사회에서 폐쇄적이고 수구적인 민족적 민주주의의 구각을 벗어나서 포용적이고 시민적인 민족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인구절벽과 지방소멸 시대에 대비해 프랑스 헌법과 같이 대한민국의 국가적 성격에 지방분권국가임을 천명해야 한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성공적 정착을 위한 정치제도 개혁은 이 시대 최고의 화두다. 이제 외국 헌법에서 예를 찾기 어려운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개정하자. 대통령제에서 대통령과 국회 다수파의 지지를 동시에 받는 경우에는 국정 안정을 구현할 수 있지만 여소야대에서는 국회의 신임과 협력에 입각한 국정 운영이 불가피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절제되지 않는 대통령 권력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전직 국회의원들의 법정단체인 헌정회에서 제시한 ‘권력분산형 대통령중심제’ 안에 의하면 국회에 내각불신임권을 부여한다. 대통령 권력의 통제와 더불어 여소야대에서 책임내각을 구현하려는 취지다. 그런데 대통령직선과 내각불신임제는 이원정부제의 본질적 요소라는 점에서 헌정회 안은 사실상 이원정부제의 제도화다.

현행 헌법을 유지하면 미국식 대통령제에서와 같은 분점정부 운영이 아니고는 파국이 불가피하다. 헌정회 안대로 하면 프랑스식 동거정부의 출현이 불가피한데, 국회 다수파의 지지를 받는 내각은 자칫 프랑스에서 경험한 동거정부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게 될 소지가 있다. 차제에 책임정치 구현을 위해 아예 의원내각제로 가자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국민들은 대통령 직선을 원한다. 어느 제도도 완결적일 수는 없다. 결국 대통령 직선제에서 대통령 무책임제를 극복하는 방안은 책임내각의 구현이다.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