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지난 14일 국회를 통과하면서 한국의 정치·사회 전반은 중대 전환점에 들어섰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선출된 8명의 대통령 중 3명이 임기 중 직무가 정지되는 비극적 사태로 정치와 제도 개혁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 여야의 원로들은 정치권이 어느 때보다 위기 극복을 위한 협치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헌법 개정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제왕적 대통령제 폐해 없앨 개헌 필요”
국민일보는 15일 정치 원로들에게 윤 대통령 탄핵안 가결 이후 한국 정치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물었다. 인터뷰에 응한 다수의 원로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제왕적 대통령제 폐해를 없앨 개헌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정대철 헌정회장은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안을) 심사하는 데도 몇 개월 걸릴 것이니 그사이에 위기를 기회로 만들 일을 계획해야 한다”며 “서둘러 ‘5년 단임제 대통령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는 개헌을 하고 그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헌정회 부회장인 유준상 국민의힘 상임고문은 윤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에 대해 “1987년 체제가 폭발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지금이 개헌의 적기”라며 “4년 중임제든, 이원집정부제가 됐든 헌법을 고친 뒤 선거를 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상임고문은 그간 정치권에서 개헌론이 수차례 나왔던 점을 언급하며 “여야가 합의만 하면 금방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출신인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의회와 정당 대표들이 나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개헌 작업”이라며 개헌론에 힘을 실었다. 문 전 의장은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촛불혁명’이라고 의미 부여하면서 “모든 국민적 혁명 뒤에는 개헌으로 마무리가 됐는데 촛불혁명 때만 개헌을 하지 못했다. 그때 개헌을 했으면 이런 일(윤 대통령 탄핵소추)은 안 생겼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정 회장과 유 상임고문, 문 전 의장 모두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에 의견이 모였다. 다만 정 회장은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을, 유 상임고문은 양원제로의 개헌을 각각 병행하자고 주장했다.
“국민이 반민주 정권 탄핵” “국가 불행”
여야 원로들은 윤 대통령 탄핵소추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성숙한 시민의식이 국제적으로 증명됐다고 평가했다. 임채정 전 국회의장은 “국민이 성숙한 민주 의식과 행동으로 반민주적인 정권을 탄핵한 것”이라며 “우리 역사가 발전해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문 전 의장도 “국민이 주도하는 역사의 순간”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김수영 시인의 ‘풀’을 인용하면서 “국민은 풀잎처럼 바람이 불면 싹 엎드려 힘이 없는 것 같아도 바람이 끝나면 들고 일어난다”고 강조했다.
유준상 상임고문은 “대통령 탄핵소추는 국가적 불행”이라며 “노무현·박근혜에 이어 윤석열까지 세 번째 대통령 탄핵안이 의결된 건 한국 정치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황우여 국민의힘 상임고문은 “민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인 데다 국방에서도 주요 사령관들이 공석”이라며 “탄핵 시기가 안 좋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주도권은 李에게…“민생·국익 우선”
원로들은 윤 대통령 탄핵소추로 여야 모두가 시험대에 올랐다고 봤다. 특히 제1야당 민주당은 수권정당 면모를 지녔느냐를 국민에게 보여줄 기회이자 위기를 맞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정국 수습의 책임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게 있다. 얄팍한 수를 쓰기보다는 통 크고 대범한,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탄핵) 정국은 대통령 권한대행이나 (직무 정지된) 윤 대통령 책임이 아니다. 향후 수개월은 이 대표가 책임지는 입장”이라며 “기회이자 시험대”라고 말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간다면 야당(현 여권)이 완전히 무력한 정치 구조가 될 것”이라며 “(한국 사회가) 지도에 없는 길에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탄핵 사태를 계기로 보수가 정국 주도권을 사실상 잃게 될 것이란 전망이다.
탄핵 사태로 인한 혼란을 조기에 수습하고 ‘민생’과 ‘국익’을 우선 챙겨야 한다는 주문도 이어졌다. 황 상임고문은 “탄핵 문제는 이제 헌재로 넘어갔다”며 “외교나 국방, 민생에 대한 건 1분 1초라도 공백으로 둘 수 없는 만큼 내각이 헌법에 따라 일을 하고 그에 대해 정치권도 협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유흥수 국민의힘 상임고문은 “여야를 떠나 지금은 정말 나라의 장래와 국익만 생각할 때”라고 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 대해서는 야권 원로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정 회장은 “국민과 야당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새 총리로 ‘선거관리용 거국중립내각’을 만들어 국정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임 전 의장은 “지금은 경제와 국가의 기본질서를 안정시켜야 한다”며 ‘한 대행 교체론’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이종선 이경원 정우진 박장군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