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덕의 AI Thinking] 혼돈 속 탄생하는 ‘창조’… AI와 역사 접목해 ‘혁신’ 꽃피울 수도

입력 2024-12-17 00:35

역사에도 인공지능 기술 스며들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 행방 추적도
AI 로 ‘창조 촉진 패턴’ 발굴 가능
현 시국 갑자기 밀어닥친 혼란도
역동의 기회라는 생각으로 임해야

창조는 ‘혼돈의 가장자리(edge of chaos)’에서 탄생한다. 이 가장자리는 질서와 무질서가 만나는 전이공간(transitional space)으로, 경계를 의미한다. 복잡한 공간에서 생명체는 최적의 적응과 창발적 행동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창조는 이러한 경계에서 질서와 혼돈의 상호작용, 역동성 가운데 생겨난다.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의 저자 스티븐 존슨은 지난 700년의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면서 탁월한 아이디어는 제약이 없는 환경에서 융합, 연결, 재결합하면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영국 산업혁명기의 많은 창의적 발상은 옥스퍼드대보다는 계급과 신분을 넘어 자유로운 혼돈의 카페에서 태동했고, 인쇄술은 흑사병이 창궐한 혼돈 속에서 나타났다.

역사는 끊임없이 변전한다. 문사철(文史哲)의 핵심 영역인 역사에도 인공지능(AI) 기술이 스며들고 있다. 구글 딥마인드와 옥스퍼드대는 AI를 활용해 고대 그리스 비문을 해독했다. AI는 수십만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사진을 분석해 행방을 추적한다.

자연어처리(NLP), 광학문자인식(OCR), 필기텍스트인식(HTR) 기술은 희생자들의 기록과 자료를 복원하는 데 사용된다. 개체명인식(NER) 기술로 인명, 지명, 시간을 식별하고 과거 사진이나 이미지에서 객체를 탐지(object detection)한다.

필자가 생성형 인공지능(AI)에서 만든 이미지 ‘혼돈과 창조 사이의 경계’.

역사라는 시간적 맥락 속에서 인간은 욕망과 고통(pain points)을 해결하는 데 AI의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먼저 문제 정의를 위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혼돈과 창조 사이의 인과적 관계는 무엇인가,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나타나는 창조의 패턴은 무엇인가 등등. 그리고 관련 데이터를 수집해야 한다.

1998년 1월 3일 서울스퀘어빌딩(당시 대우그룹 본사)에서 열린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에 시민들이 동참한 모습이다. 국민일보DB

첫째, AI를 역사에 활용하려면 사건에 관한 데이터를 시기별 사건과 주요 변화,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요인 및 성장과 혁신지수 등을 상세히 모을수록 좋다. 역사에서 혼돈과 창조의 패턴을 분석하는 AI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그 모델로 기계학습을 시킨다. 역사적 맥락은 대체로 시간적 관계에 속한다. 순환신경망(RNN)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시계열 데이터이기 때문에 역사, 문장, 시세 등 순차적인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적합하고, 흐름을 예측하는 데 유용하다. 한편 생성형 AI에 속하는 트랜스포머(transformer) 모델은 RNN처럼 차례로 처리하지 않고 문장이나 키워드를 동시다발적으로 병렬 처리하므로 속도가 빠르고, 자기주의 메커니즘(self-attention) 덕분에 긴 문맥이나 복잡한 시간적 변화와 연관성을 분석하기 유리하다. 속도와 정확도가 높아 역사에 AI를 활용하는 데 효과적이다.

둘째, AI는 혼돈과 창조 사이의 인과적 연결성을 분석해 창조를 촉진하는 패턴을 찾아내고 메커니즘을 추론할 수 있다. 어떻게 혼돈(예: 봉건제 붕괴, 노동 구조 변화에 따른 갈등)이 창조로 진화(예: 철학·과학·예술의 발전, 자본의 축적)됐는지 분석한다. 이러한 연관성을 그래프기반네트워크모델(GNN)을 통해 시각화하면 더욱 명확해진다. GNN은 혼돈의 요소와 창조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시각화하고, 각 사건과 인과관계의 중요도를 평가할 수 있다. 또한 GPT와 같은 생성형 AI 언어 모델을 활용해 혼돈, 창조와 관련된 핵심 키워드와 관계를 표시하는 서술형 패턴을 생성하고 창조적 혁신과 관련된 시나리오를 도출할 수 있다.

셋째, 우리 역사에도 ‘혼돈의 가장자리와 창조’ 이론을 적용할 수 있다. 과거 어두운 시절에는 ‘안티테제의 변증법’을 통해 성숙한 시민 역량과 새로운 DNA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어둠이 빛을 열망하게 만든 것처럼 ‘혼돈의 가장자리’는 강력한 창조의 촉매로 작용했다. 하지만 어둠이 없으면 빛도 사라진다. 어둠과 빛이 양면의 쌍둥이듯 혼돈과 창조도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예컨대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에 큰 혼란을 초래했으나 경제 개혁과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 체질을 개선하고 혁신 경제로의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됐다. 이 과정에서 정보기술(IT) 산업과 벤처 붐이 일어나 새로운 도약의 기반이 됐다. AI와 인과 추론 모델(예: PSM 및 Do-Cal 모델)을 활용하면 외환위기가 IT산업 성장 같은 창조적 결과로 이어진 메커니즘을 분석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 간 연속성과 상관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RNN 모델(LSTM, GRU 포함)과 트랜스포머 모델을 활용해 시계열 데이터를 학습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역사적 변화의 패턴을 분석하고, 혼돈과 창조가 발생하는 시점과 구조를 예측할 수 있다. 또한 감정 분석 모델로 당시 대중의 열망을 분석해 창조적 변화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 강화학습 기반 모델은 특정 정책이 혼란에서 혁신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시뮬레이션해 외환위기와 같은 혼돈에서 창조적 결과를 촉진한 주요 요인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

역사에 혼돈은 있게 마련이다. 만약 국가나 조직이 어떤 혼돈도 없이 지극히 안정된 상태에 고착되면 생명력을 잃고 멸종한다. 따라서 우리는 현 시국처럼 갑자기 밀어닥친 ‘혼돈’ 속에서 좌절하기보다 혼돈이야말로 새로운 ‘혁신과 창조’를 낳을 수 있는 기회이자 역동의 공간이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인간과 협업하는 AI에도 이러한 통찰과 지혜의 데이터를 제공하면서 창조적 패턴을 발굴하고 추론할 필요가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헤겔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했다. 프랑스 혁명을 관찰한 마르크스는 ‘한번은 희극으로, 또 한번은 비극으로 반복된다’고 했다.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지만 아무도 듣지 않기에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앙드레 지드의 경고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혼돈의 역사 데이터와 경구를 때가 되면 알려주는 AI 알고리즘은 어떨까.

여현덕 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