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껄껄 웃으며 구수한 말투로 친근하게 말씀하셨다. “아따 그라냐 근데 어쩜 공을 그렇게 이쁘게 친다냐. 내 폼 좀 봐 줄 수 있나?” “아 그라시죠. 어디 한 번 해보셔요. 그럼 제가 봐 드릴 게라.”
나는 6개월 동안 터득한 대로 가르쳐 드렸다. “거 참, 신통허네. 한 마디 한 마디가 달라. 잘 배우고 간다. 나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의 이사장이여. 수학여행 갈 만한 데 찾으러 왔다가 골프 선생을 만났구먼. 혹시 서울 올라오믄 전화해라, 잉.” 그리고 명함을 내미셨다. “우리 학교에 오믄 일주일에 두 번씩 필드에 나가게 해 주마 니도 알겄지만 연습장에서 하는 거와 필드에서 하는 거가 천지 차이다잉. 니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올라오거라잉. 내가 다 알아서 해 줄랑게.”
나는 보통 사업가나 일반 사람이 그냥 자기 명함을 주나보다 하고 무심코 책가방에 넣어뒀다. 2주가 지나고 어느 날이었다. 방에 누워 자고 있는데 그분 이름이 문득 생각이 났다. 가방을 통째로 털자 명함 한 장이 떨어졌다. ‘한서고등학교 이사장 김재천’이라고 쓰여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서고 설립자였다.
순간 이사장님이 하셨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당시만 해도 완도에서는 누구네 집 아들이 광주로 유학 간다고 하면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서울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분께 엄청나게 잘해드렸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대했다. 명함을 보자마자 서울로 가야겠다 싶었다.
옛날부터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있다. “고기는 큰물에서 놀지, 조그만 데 가믄 고기가 없다. 남들이 가는 곳에 가 봐야 그것이 그것이여.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 가야 큰 고기를 잡을 수 있는겨. 남들 안 하는 일을 먼저 하는 넘이 뭐라도 한당게.” 아버지를 따라 멀리 가다 보면 진짜로 거기에 고기가 있었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최경주의 경이 서울 경(京)자인 이유가 있었다. 서울을 두루두루 다니라는 의미였다. 나는 서울로 갈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단 차비를 벌어야 했다.
6개월 사이 골프연습장에도 손님이 많이 늘었다. 그분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내가 먼저 다가서야 했다. 손님들의 골프채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골프채가 지저분하면 공도 커브를 그리며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튄다. 공을 올바른 방향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수시로 닦아줘야 한다. 손님들도 자신의 골프채가 깨끗하게 정돈돼 있자,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어른 한 두 명이 “야 너 뭐 필요한 거 있냐”고 물어왔다. “내가 말한 대로 다 줄랍니까?” “허허, 말해봐라. 이놈아.” “제가 사실은 서울을 가려고 하는데 차비가 없당게요.”
서울을 많이 다녀와 본 어른들은 5만원을 건넸다. 어린 나는 이분들이 뭘 해주면 좋아한다고 생각해 골프화 관리도 했다. 옛날 골프화 뒤꿈치에는 쇠징이 박혀있었다. 스윙하면서 힘이 쏠리다 보면 한쪽 뒤꿈치가 닳는데 나는 쇠징을 무료로 갈아줬다. 처음에는 교체하는지도 모르지만, 치다 보면 미묘한 달라짐을 눈치챌 때가 있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