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2024헌나8’의 의미

입력 2024-12-16 00:38 수정 2024-12-16 00:38

尹, 올들어 8번째 탄핵 사건
대화·타협 실종된 정치 탓에
사회 분열 심해질 가능성 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사건번호는 2004헌나1,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번호는 2016헌나1이었다. 2016년 법조팀 기자들에게 탄핵심판은 생소한 절차였다. 노 전 대통령 이후 탄핵심판 자체가 처음이라 ‘헌나1’이라는 번호가 상당히 무게감 있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박 전 대통령 탄핵심판이 선고된 2017년 3월 10일 아침 일찍 헌재 주변 공기는 무겁게 짓눌려 있었다. 헌재 브리핑룸에서 초조하게 선고를 기다리는데 이정미 당시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헤어롤’ 두 개를 머리에 달고 출근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엄중한 탄핵심판에 긴장하는 건 지켜보는 국민도, 선고하는 재판관도 똑같았다.

박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이후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선 “촛불과 민주주의의 승리” 등 축제와 같은 반응이 나왔다. 박 전 대통령은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를 관리하지 못했고 최씨 이권을 위해 직접 나섰다는 점에서 파면은 사필귀정이었다. 하지만 헌재 심리를 비교적 가까이 지켜봤던 입장에서 대통령 탄핵심판 과정은 축제라기보다는 비극에 가까웠다. 1차적으로 대통령이 위헌·위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대통령을 파면할지를 놓고 3개월간 헌재 심판정에서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는 것, 국가의 미래를 결정지을 사안을 9명 재판관 손에 맡겼다는 것, 심판 전후 사회가 극심한 분열에 시달렸다는 것 자체가 되풀이돼선 안 될 비극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은 열리지 않길 바랐다. 박 전 대통령 탄핵심판 이후 약 8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의 정치적 분열과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문화는 더 극심해졌다. 사법의 심판대, 특히 탄핵 심판정에선 타협이 없고, 파면이냐 아니냐만 있다. 정치적·사회적 문제가 법정에 오르는 순간 결론은 지는 편과 이기는 편으로 나뉜다. 윤 대통령은 어처구니없는 비상계엄 사태로 더 이상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비상계엄 선포는 위헌·위법하고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데 법조계도 국민도 이견이 거의 없다. 윤 대통령 본인이 빠르게 퇴진 결심을 밝히고, 여야가 정치적 합의를 거쳐 향후 대선 일정을 정하고 서로 합심해 국가적 위기를 헤쳐 나갔으면 했다. 하지만 대통령과 한국 정치는 또 국가 중대사를 사법기관에 맡기는 쪽을 택했다.

이제 탄핵심판은 더 이상 생소하지도 새롭지도 않다. 두 명의 대통령 탄핵심판 이후 2021년 임성근 전 부장판사 사건(각하)이 접수됐다. 이어 2023년에만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기각), 안동완 검사(기각), 손준성 검사장(절차 정지), 이정섭 검사(기각) 등 모두 4건의 탄핵심판이 접수됐다. 올해에도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최재해 감사원장,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조상원 서울중앙지검 4차장검사, 최재훈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2부장검사, 박성재 법무부 장관, 조지호 경찰청장 사건이 접수됐고 모두 아직 심리 중이다. 사상 초유의 판검사 탄핵, 장관 탄핵 등이 이어졌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 사건 이후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제기된 탄핵심판 중 헌재에서 인용된 건 아직 한 건도 없다.

민주당과 윤 대통령은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처럼 폭주했고, 결국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로 올해의 여덟 번째 탄핵열차 ‘2024헌나8’에 올라탔다. 한국 정치에 대화와 타협은 실종됐고, 이 상황에 상당한 역할을 한 윤 대통령은 소통이 아닌 ‘총칼’을 드는 쪽을 택했다. 마지막 순간에도 국민을 위해 한발 양보하기보단 사실상 법정에서 끝까지 싸우겠다는 뜻을 밝혔다. 8년 전 사태에 비춰보면 이번 탄핵심판으로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은 더 극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갈등을 대화로 해결하지 않고 고발장과 탄핵소추안을 들고 사법기관으로 달려가는 일도 더 잦아질 것이다. 윤 대통령은 결국 한국 사회를 대결 구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선택을 했고, 정치인들은 손익계산에만 바쁘다. 한국 사회의 되풀이되는 비극이다.

나성원 사회부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