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프로 골퍼가 되기까지 많은 분의 작고 큰 도움이 있었다. 어르신들이 도와주시기 전까진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거나 차를 빌려 타곤 했다. 한 번은 사부님이 소를 싣는 트럭을 빌려 오셨다. 자리가 비좁아 나는 클럽을 안고 짐칸에 타야 했다. 지나가는 차마다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내게 손을 흔들며 웃어 대서 어찌나 창피했는지 모른다. 아무리 넉살 좋은 녀석이라지만 그것만은 부끄러웠다. 시커멓고 우락부락하게 생겼어도 열일곱 사춘기 소년이었다.
나는 골프가 좋았다. 그래서 연습에만 매달렸다. 골목대장 노릇 하며 친구들을 몰고 오봉산 자락을 누비던 내가 친구도 포기했다. 무언가 얻으려면 잃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대신에 쉰이 넘은 어르신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어깨너머로 지혜를 배우고 인생을 배울 수 있었다.
18홀 코스 안에는 나무, 벙커, 연못 등 여러 장애물과 오르락 내리락하는 언덕이 있다. 오르막이라고 힘겨워 포기하거나 내리막이라고 쉽게 보고 덤비다가 넘어져서는 안 된다. 뒤처지다가도 언제든 역전이 가능하고 앞서가다가도 추월당할 수 있는 게 골프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어르신들이 골프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신 이유를 살아가면서 깨달을 때가 많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주어진 상황에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날, 광주 컨트리클럽에서 캐디 없이 36홀을 혼자 돌고 난 뒤에 골프 카트를 반납하려고 클럽하우스로 들어갔다. 돌아서는 길에 무심코 앞에 보이는 계단을 따라 올라갔더니 옥상에 깨끗한 새 카트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그동안 카트는 다 낡고 더러운 줄로만 알았다. 별세계를 보듯 몽롱해졌다.
가까이 가서 보니 카트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당시 국가대표와 상비군으로 이름을 날리던 광주 출신 골프 선수들의 이름이었다. 물론 내 이름은 없었다. 큰 충격을 받은 나는 지금도 그 이름표가 잊히지 않는다. 부럽기도 하고 서럽기도 했다. 오기가 생겼다.
“나도 최경주 이름 석 자를 붙인 내 카트를 기필코 갖고야 말겠다. 반드시 최고의 프로 골퍼가 될 테니, 두고 봐라.”
혈기왕성했던 나는 승부욕이 발동했다. 스스로도 운동만이 살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골프가 마냥 재밌기만 했던 때였다. 그런데 비로소 구체적인 목표가 생긴 것이다. ‘내 이름표가 붙은 카트 갖기.’
그해 9월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날따라 화홍리 골프연습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연습하고 있는데 손님 한 명이 들어왔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옷차림은 말쑥한 신사분이었다. 한눈에 봐도 서울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공을 치러 왔는데요. 공 좀 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어서 오세요. 공 내드릴께라.” 공 한 상자를 내드리고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연습했다.
“프로님, 스윙 폼이 참 예쁘십니다.” “저보고 하신 말씀입니까? 저 프로 아닌 데라. 저기 보이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1학년 학생인데요. 그리고 골프 시작헌 지도 6개월밖에 안 됐어라.”
내 인생을 바꿔놓은 은인과의 첫 만남이었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