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계에는 ‘김민정’이 많다. 프로듀서, 연출가, 극작가, 배우, 스태프, 작곡가 등 줄잡아도 10명은 넘을 것이다. 이 가운데 극작가 김민정은 두 명이다. 두 김민정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전문사 선후배이자 극작가에 수여되는 최고 권위의 차범석희곡상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김민정이 오는 18~22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되는 ‘작은 창극 시리즈’에서 나란히 작품을 선보인다. 공연을 앞두고 두 김민정을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2022년 ‘산을 옮기는 사람들’로 차범석희곡상을 받은 선배 김민정(52)은 2003년 ‘브라질리아’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이후 연극 ‘바다거북의 꿈’ ‘브루스니까 숲’, 뮤지컬 ‘와이키키 브라더스’ ‘에릭 사티’, 창극 ‘정년이’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활동했다. 그리고 올해 ‘미궁의 설계자’로 차범석희곡상을 받은 후배 김민정(50)은 2004년 국립극장 신작희곡페스티벌에 ‘가족의 왈츠’가 당선되며 데뷔했다. ‘해무’ ‘하나코’ ‘시간을 칠하는 사람들’ ‘정율성’ 등 한국 현대사에서 소재를 가져온 묵직한 희곡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이와 함께 창작오페라 ‘붉은 자화상’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2022년 국립창극단 ‘작창가 프로젝트’에서 선정
“저희가 한예종 연극원 전문사 시절부터 수업을 같이 듣는 등 친분이 오래됐죠. 20년이 넘은 것 같네요. 주변에서 저희 둘을 ‘큰 민정’ ‘작은 민정’이라고 불러서, 저희끼리 누군가는 이름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했을 정도예요. 2년 전 차범석희곡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저는 민정이에게 가야 할 전화가 잘못 온 줄 알았어요.”(선배)
“저도 언니 찾는 전화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 덕분에 언니가 요즘엔 어떤 작업을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2년 전 언니가 차범석희곡상을 받았을 때도 저로 오해한 사람들로부터 축하 전화가 왔었어요. 하하. 그때 시상식 뒤풀이에서 언니가 제게 ‘머지않아 네가 받을 거야’라고 말했는데, 2년 만에 진짜로 받게 됐어요.”(후배)
두 김민정이 이번에 참여한 ‘작은 창극 시리즈’는 국립창극단이 차세대 작창가를 발굴 및 양성하기 위해 2022년 도입한 ‘작창가 프로젝트’에서 발전됐다. 창극에 필수적인 ‘작창(作唱)’은 한국 전통음악의 다양한 장단과 음계를 활용해 극의 흐름에 맞게 소리를 짜는 작업이다. 최근 ‘창극 르네상스’로 불리지만 국립창극단은 동시대와 호흡하는 창극을 위해 작창가 등 창작진을 키워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신진 작창가와 중견 극작가로 네 팀을 구성한 뒤 극작가 겸 연출가 고선웅, 극작가 배삼식, 작창가 한승석 이자람의 멘토링을 거쳐 30분 분량으로 시연회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높은 평가를 받은 2개의 작품이 1시간짜리 정규 창극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을 가지게 됐다. 이때 뽑힌 작품이 선배 김민정-작창가 박정수 콤비의 ‘덴동어미 화전가’와 후배 김민정-작창가 장서윤의 ‘옹처’다.
‘옹처’, 현대인 시각에서 친숙한 원작 비틀기
후배 김민정은 “요즘 창극의 시대가 왔다고 할 만큼 창극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서 국립창극단에서 ‘작창가 프로젝트’ 제안을 했을 때 드디어 창극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뻤다”면서 “경쟁 시스템이었지만 언니를 비롯해 여러 창작자와 자주 만나서 작품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선배 김민정도 “‘작창가 프로젝트’는 내게 주어진 또 하나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지난해 국립창극단의 ‘정년이’로 먼저 창극 작가로 데뷔했다”면서 “창극이 나랑 잘 맞는 옷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국립창극단에서 작업하면서 창극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작창가 프로젝트’는 원래 판소리 열두 바탕 가운데 유실된 일곱 바탕을 소재로 했다. ‘옹처’는 판소리가 실전되고 이야기만 남은 ‘옹고집타령’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창작한 작품이다. 원작은 학대사가 볏짚으로 만든 가짜 옹고집을 이용해 심술궂은 진짜 옹고집을 개과천선 시킨다는 내용이다. 후배 김민정은 옹고집의 아내 옹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퉁명스러운 진짜 옹고집(진옹)과 다정한 가짜 옹고집(허옹) 중에 남편을 고른다는 이야기에 현대인의 감각을 반영했다. 시연회 당시 민요 ‘옹헤야’의 선율을 활용하는 등 “흥겹고 해학적”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고전소설 ‘옹고집전’은 동화로도 만들어질 만큼 유명하기 때문에 처음엔 관객에게 식상하지 않을까 우려됐어요. 하지만 누구나 다 아는 만큼 이야기를 비틀기에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서윤 작창가와 의견을 나누며 창극의 4.4조의 율문 형식에 옹처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이번에 정규 창극으로 발전시키면서 현대인의 시각에서 납득하기 어려웠던 원작의 결말을 바꿨습니다.”
‘덴동어미 화전가’, 함께 살아가는 것의 가치
‘덴동어미 화전가’는 원래 덴동어미가 인생의 풍파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조선시대 내방가사다. 덴동어미는 잇따른 불행으로 네 번을 개가(改嫁)한 뒤 낳은 아이가 불에 덴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선배 김민정은 덴동어미를 비롯해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인간군상을 통해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것의 가치를 담았다. 시연회 당시 “서사와 소리가 잘 어울어진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창극으로서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인정받았다.
“원래 유실된 일곱 바탕 가운데 남편 장끼가 아내 까투리의 충고를 무시했다가 덫에 걸려 죽는 ‘장끼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박정수 작창가랑 두 달가량 계속 회의를 했지만 둘 다 작품에 대해 꽉 막힌 느낌이었어요. 그때 멘토였던 배삼식 작가가 새롭게 추천한 고전 가운데 ‘덴동어미 화전가’가 있었습니다. 혹시 몰라서 ‘장끼전’ 대본을 써놓긴 했지만 저나 박 작창가나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덴동어미 이야기에 더 끌렸어요. 아쉬움이라면 공연 시간을 1시간 넘기지 말라고 해서 대본을 많이 잘라낸 거예요.”
“극작가는 외롭고 힘들지만 나의 길”
두 김민정은 데뷔 이후 20년 넘게 꿋꿋하게 극작가의 길을 걸어왔다. 국내 공연계에서 전업 극작가로는 생계를 꾸리기 쉽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그동안 다양한 부업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두 김민정에게 삶의 중심은 언제나 무대였다. 그리고 연극에서 시작해 뮤지컬, 음악극 그리고 창극까지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혀 왔다.
후배 김민정은 “대학 시절 내가 쓴 대본을 연출가가 무대에서 입체화시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것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극작가가 되어 연출가, 스태프, 배우의 공동작업을 통해 내 대본이 관객과 만나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면서 “극작가는 대본 뒤에 숨을 수 있으면서도 소설가처럼 혼자 외롭게만 쓰지도 않는 점이 나랑 맞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공연예술은 순간의 예술이기 때문에 더 소중하고 가치있게 느껴진다”고 피력했다. 그리고 선배 김민정은 “어릴 때는 내 작품이 무대에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하지만 30대에 드라마나 시나리오가 많이 엎어지면서 얼마나 이 시간을 견딜 수 있을지 고민하며 흔들리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꾸준히 내 작품이 공연되고 운 좋게도 가끔 상도 받다 보니 공연계에 빚을 진 것 같아 떠나지 못하게 됐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냥 입 다물고 계속 쓰기로 했다”고 웃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