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두 달 되던 때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편집국에서 뉴스 속보를 숨죽여 지켜보는데 한 선배가 툭 내뱉듯 말했다. “이 사건, 최소 한 달은 가겠다.” 그 말뜻을 잘 몰랐지만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구나 생각했다.
현장으로 가라는 지시에 옷가지를 챙기면서도 한 달 뒤에는 끔찍한 참사가 수습돼 있길 기도했다. 단원고 학생들이 무사히 돌아오고 모두의 일상이 치유되는 상황을 바랐다. 하지만 모두가 알 듯 참사의 상처는 한 달에 그치지 않았다. 2014년 4월 16일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자세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도 너무나 많다.
이후에도 특정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6개월’이나 ‘1년’ 단위로 정의하는 표현을 많이 들었다. 신문 지면과 방송 뉴스를 도배하는 기간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사건의 경중을 가늠해볼 수 있다는 의미였다. 2016년 7월 TV조선이 미르재단 의혹을 최초 보도한 것을 봤을 땐 이 사건이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질지 상상조차 못했다.
하지만 그해 10월 JTBC의 ‘최순실(최서원) 태블릿PC’ 보도가 나오며 국민적 공분이 절정에 달하고, 12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과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 5월 벚꽃 대선까지 숨 가쁘게 이어지는 사건을 겪으면서 ‘몇 년은 가는’ 대형 사건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이런 기억 탓인지 지난 3일 밤 10시30분 비상계엄이 선포된 순간에도 이것이 ‘얼마나 갈 사건’인지 가늠하고 있었다. 대통령 탄핵까지 수 주일, 헌재의 탄핵 결정까지 두 달, 이후 60일 안에 대선이 열리고 차기 정부 출범까지 반 년 정도…. 여기에 대통령과 관련자들의 재판까지 1∼2년 정도 더….
그러나 계엄 사태 일주일이 지나도 그날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런 식의 정의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공무원 시험 출제에도 잘 나오지 않는 헌법상 탄핵 절차를 줄줄이 읊는 국민들을 보면서, 법률가도 아닌데 직권남용의 법리가 무엇인지 따져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사건은 지면이나 방송 뉴스에서 멀어져도 사람들의 뇌리에선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목도한다.
이런 사건들은 무의식에 남아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바꾼다. 최근 계엄 사태에 연루된 특전사령관 등 군 장성들은 대통령의 지시 내용과 불응 내역을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다. 계엄 이전에도 10%대 수준 지지율이던 윤석열정부의 상황과 채 상병 순직 사건 등으로 멀어진 군심도 원인이겠지만, 앞서 정권의 부당한 지시를 그대로 따랐던 공직자들이 어떤 처벌을 받게 됐는지 똑똑히 지켜봤기 때문일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언이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도 많다. 공직자가 자신의 직권을 남용해 위법한 권한을 행사할 경우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대통령이 헌법을 어긴다면 임기 도중 언제라도 끌려내려올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이 윤 대통령 아니냐는 것이다.
국정농단 특별검사팀의 수사팀장으로서 박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던 게 그였다. 권좌에 오르고 그와 유사한 위헌 사태로 사법처리 수순에 오르게 된 것이 역설적이라는 헛웃음도 많다. 그의 뇌리에 정말 국정농단 사건의 교훈은 지워졌던 것일까.
이번 계엄 사태도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바꾸고 있다. 주변에선 농반진반으로 내년엔 정말 술을 끊겠다는 이가 많다. 국내 정세 혼란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산을 갖기 위해 미국 증시나 가상자산 투자를 확대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마스크는 벗어도 손 씻는 습관은 이어지는 것처럼 이번 사태도 기억에서 멀어질지 몰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탄핵 정국이 매듭지어지면 국민의 선택을 받아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게 된다. 그때쯤이면 계엄 뉴스도 대중의 관심사에서 서서히 멀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국민의 염원으로 출범한 새 정부가 자충수로 몰락해 교체되거나 정권을 내주는 상황을 너무나 많이 봐 왔다.
설마 그걸 모르겠어 하는데도 자승자박하는 경우를 질리도록 봤다. 새 정부는 계엄 사태의 교훈을 얼마나 깊이 간직할 것인가. 새 대통령도 격무에 바쁘겠지만 앞선 대통령들의 취임과 퇴임일 신문 지면을 관저에 붙여놔 보면 어떨까. 한 달이든 일 년이든 국민들은 오늘날 같은 뉴스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양민철 경제부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