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문구점의 카드들이 눈길을 끌곤 했다. 반짝이는 트리가 대부분인 카드 속 그림 가운데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건 서로 다른 두 개의 마구간이었다. 하나는 마치 유럽풍의 아늑한 헛간처럼 보였다. 지붕에는 밀짚이 깔려 있고, 따스한 빛이 구유에서 퍼져나오는 그런 마구간. 다른 하나는 한없이 열악한 곳이었다. 얼어붙은 대지에 구유는 텅 비어 있었고 나귀, 소, 양이 고개를 떨군 채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어린 내게도 궁금증이 생겼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은 과연 둘 중 어디였을까?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베들레헴의 마구간은 여러 상징으로 재현됐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베들레헴 중앙 광장의 공용 마구간을 소개하며, 예수님 탄생을 극도로 비정한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로 묘사했다. 공용 마구간은 추위와 소음, 동물들의 냄새가 섞인 곳이었다. 그곳은 철저히 소외와 거절의 상징이었다. 아기 예수는 이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들의 자리로 내려오셨다.
반면 케네스 베일리는 한 농가의 실내 마구간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이곳이 아늑하고 따스한 공간으로, 아기 예수가 보통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태어났다는 새로운 해석을 찾아냈다. 베일리의 해석은 환대와 나눔의 상징으로, 예수님의 탄생이 평범한 농가에서 이뤄진 사랑의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바클레이와 베일리의 해석은 얼핏 상반되는 것 같아도 사실 크리스마스의 중심 메시지인 ‘환대와 사랑’으로 수렴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차가운 외면 속에서도 누군가의 따스한 공간에서 사랑으로 환영받으셨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본 성극 ‘빈방 있습니까?’가 떠오른다. 여관 주인 역을 맡은 바보 소년 덕구가 “빈방 없어요”라고 한마디 대사를 해야 했지만, 차마 그 말을 못하는 덕구. 대신 “빈방이 있으니 어서 들어오세요”라고 외치는 바람에 연극은 엉망이 되고 만다. 집으로 돌아온 덕구는 방에서 혼자 울면서 기도한다. “예수님한테 방이 없다고 차마 말할 수는 없었어요.”
덕구의 실수는 성극을 망친 것 같지만 사실은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메시지를 완벽히 전했다. 덕구의 마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을 닮아 있다. 교부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에게 방(코라)이 되어주는 관계, 곧 상호내주(페리코레시스)를 통해 한 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고 말했다. 덕구가 자신의 ‘방’을 예수님께 내어드린 것은 바로 삼위일체적 환대의 실천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를 위해 공간을 내어주는 데서 시작된다.
베일리가 찾아낸 농가의 구유는 단순히 동물들의 먹이통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신이 만나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거기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하늘의 왕관 대신 이 땅의 가난을 입으셨다. 그 가난 속에서도 구유를 통해 보여주신 것은 소외와 거절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이 빈방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한 구두 수선공이 얼어붙은 길가에 웅크린 천사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간다. 그의 작은 방이 아니었다면 그 천사는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께는 작은 구유가, 천사에게는 구두 수선공의 방이 필요했다. 우리도 삶의 구석구석에 이런 작은 빈방을 장만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교회는 지금 바클레이의 차가운 마구간과 베일리의 따스한 마구간 사이 어디쯤 있을까. 어쩌면 인생이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작은 빈방 하나면 충분하고도 남을 텐데…. 정말 그렇지 않은가? 그런 “빈방 있습니까?”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7)
송용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