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늄노트] “이젠 안녕”

입력 2024-12-13 00:35

정치 혐오·극단주의 방치한
책임 적지 않아… 민주주의
이어갈 젊은 세대 주목한다

이번 학기 한 교양 수업에는 세계 15개국에서 온 90명의 외국인 학생이 수강했다. 외국인 학생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쉬운 한국어로 진행되는 이 수업은 우리 삶의 폭넓은 주제들이 반영된 한국 대중가요들을 철학적이거나 사회학적인 텍스트와 연결해 교육한다. 예를 들어 ‘소비’를 주제로 한 수업에서는 지코의 ‘새삥’을 장 보들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의 한 대목과 연결했고, ‘교육’이 주제가 될 때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과 연결해 수업했다. 윤수일의 ‘아파트’ 같은 경우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과 견주며 도시의 ‘거주’ 문제를 성찰하게 했다. 외국인에게는 낯선 노래였지만, 마침 유행하기 시작한 로제의 ‘아파트’ 덕을 봤다.

‘국가’는 가장 신중하게 선택했던 주제였다. 학생들의 본국 정치 상황을 존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가장 큰 틀이 ‘국가’임을 부인할 수 없기에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 존재성을 학습하며 국가 공권력이 국민 주권에 의해 합법적인 통제를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성찰해 보고자 했다. 두 번의 고민 없이 선택된 양희은의 ‘아침이슬’은 폴 리쾨르의 ‘역사와 진리’의 한 대목과 연결돼 ‘쿠데타’나 ‘독재’ 같은 국가폭력의 위험과 시민 저항의 의미를 배우는 교재가 됐다. 이 수업에서 나는 여전히 정치적 불안이 존재하는 국가에서 온 학생들의 떨리지만 진지한 눈빛을 마주하며, 한국 민주주의운동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에 마음이 약간은 울컥했다.

그러나 정확히 열흘 뒤 계엄군이 총을 메고 국회에 진입했다. 다행히 여섯 시간 만에 계엄은 해제됐지만 이미 일상을 쉽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회는 혼란했다.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위험과 불안을 안고서 나는 어떻게 외국 유학생들 앞에 서야 할지 막막했다. 그들도 간밤에 벌어진 일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수업을 시작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불과 열흘 전 같은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는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이 땅에는 다시는 군사 내란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나는 ‘다이내믹 코리아’에 희망을 걸고 온 이 순진한 학생들에게 그토록 안일한 낙관주의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이미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정치적 극단주의와 혐오로 인해 합리적 의사결정과 타협이 마비되고 대다수 시민이 정치적 효능감을 상실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아니 나는 민주주의를 ‘그들만의 것’으로 방치해 오며 넌더리를 치지 않았던가!

부끄러운 마음에 말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본국에 계신 부모님들의 걱정 가득한 전화를 받았다는 말에 더욱 할 말이 없었다. 너무 늦지 않게 귀가할 것을 당부하고, 비상상황 시에는 학교가 학생들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감히 희망을 쉽게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나는 그들 앞에 다시 설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여의도에 쏟아져 나온 젊은 시위대가 화음까지 넣어 부른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영상을 마지막 수업에서 보여주자 외국인 학생들 얼굴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아직 함부로 해석하기는 이르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어가는 새로운 세대를 마주한 것이다. 캠퍼스 곳곳에도 성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들이 자신의 실명을 내건 시국선언 대자보를 줄줄이 붙이고, 연대하는 학생들이 대자보에 서명하며 뜻을 모으고 있다. 내가 섣부르게 자부했던 우리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 과정에 있는 것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지금으로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외국인 학생들이 이 새로운 세대에 주목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 ‘반복되는 슬픔’ 앞에 재기발랄한 분노로 “이젠 안녕” 하고 외치는 ‘다시 만난 세계’의 주체들을!

김혜령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