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87년 체제

입력 2024-12-12 00:40

전직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대한민국헌정회가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개최한 토론회 주제는 개헌이었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소모적 정쟁을 중재할 제도적 장치가 없고, 5년 단임 대통령 중심제에선 제왕적 대통령 또는 정반대의 식물 대통령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면서 대통령 4년 중임제와 국회 양원제 도입의 개헌을 제안했다. 헌정회의 우려는 꼭 1주일 만에 현실이 됐다. 12·3 비상계엄은 입법 권력을 쥔 야당과 중재 없는 극한 대결을 벌이던 대통령이 이러다 정부 기능 마비로 식물 대통령이 되겠다는 위기감을 앞세워 제왕적 대통령의 길을 택한 사건이었다.

이 토론회에서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은 “1987년 헌법을 만들 때 직선제 쟁취에 몰두해 민주화 이후 문제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한계를 정치학계는 “87년 체제에선 성공한 대통령이 나올 수 없다”는 말로 경고해 왔다. 권력 분산과 협치의 토대를 갖추지 못한 헌법에 따라 배출된 대통령들은 창대한 시작과 초라한 말로를 공식처럼 답습했다. 경제위기를 부르거나,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감옥에 가거나, 탄핵을 당하거나…. 이제 내란 수괴 대통령까지 나올 판이다.

한국의 압축 성장은 계단식 성장이었다. 4·19혁명과 5·16쿠데타, 유신 저항과 12·12사태, 87년 6월 항쟁. 기존 체제가 고인 물이 됐을 때 민주적이든 비민주적이든 그것을 뒤엎는 사건이 있었고, 이는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한바탕 난리를 겪어야 도약의 발판이 마련되는 서글픈 숙명인데, 87년 이후 40년이 다 되도록 그러지 못했다. 아마 박근혜정부 국정농단 사태가 기회였을 것이다. 87년 체제를 넘어서자는 개헌론이 분출했지만 결국 기존 방식에 안주했던 한국은 8년 만에 다시 비상계엄 사태를 맞았다.

윤석열 대통령 거취의 가닥이 잡히면 이번에도 87년 체제를 둘러싼 제언과 주장이 쏟아져 나올 듯하다. 그런 글이 이미 여러 지면에 보이기 시작했다. 과연 이번엔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을지, 우리 선택에 달렸다.

태원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