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강에서]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입력 2024-12-12 00:37

햇수로 3년째. ‘육아빠’(육아하는 아빠)로서 겪는 애환과 일상의 고찰을 칼럼으로 풀어내다보니 정서적 친근감을 표하는 동년배 부모들로부터 이메일, 다이렉트메시지(DM) 등을 받곤 한다. 내용의 길고 짧음을 떠나 전달된 메시지의 대부분은 공감의 표현 또는 공감의 호소로 귀결된다. 칼럼에 묻어나는 육아 전쟁터의 흔적에 반가운 전우애를 느끼는 이들, 현재 겪고 있는 가혹한 육아 현장이 오로지 자신만의 고충이 아니길 확인코자 하는 이들의 적극적 반응인 셈이다.

지난 4일 여의도에 거주한다는 한 육아빠에게 장문의 DM을 받았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두 가지 측면에서 놀랐다. 하나는 DM을 주고받기엔 이례적인 시간대였다는 점, 다른 하나는 비상계엄 사태가 벌어져 많은 국민이 혼란과 불안을 겪는 상황에서 보내온 DM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열어본 DM엔 울분과 좌절감, 하소연이 뒤엉켜 있었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2주간의 해외 출장길에 오른 아내를 대신해 ‘독박 육아’를 하던 아빠는 생후 7개월 된 아이를 재우느라 며칠째 고군분투 중이었다. 아기띠에 아이를 둘러 안은 채 두 시간여 무릎 튕기기와 궁둥이 토닥임을 시도한 끝에 극적으로 아이가 잠에 든 터였다.

그때 창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국회로 향하던 계엄군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였다. 굉음의 결과는 참담했다. 울음을 터뜨리며 깬 아이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다시 시작된 무릎 튕기기를 무한 반복하는 동안 아빠는 녹초가 되어 갔다. 상상도 못했던 계엄군 헬기의 등장, 아빠의 애끓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통 멈추지 못하는 아이의 울음, 배변인지 배고픔인지 어디가 아픈지 졸음 때문인지 도무지 이유를 찾지 못하는 아빠는 “왜 그래”를 반복하며 좌절하다 진이 빠진 채 DM을 보낸 거였다. 그날 밤 그에겐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던 그 어떤 혼란보다 자기 몸통의 반에 반도 안 되는 생명 하나가 가져온 혼란이 크게 느껴졌던 거다.

수년 전 DM의 주인공처럼 아기띠를 내 몸처럼 두르고 있던 시절이 떠올랐다. 쉬이 잠들지 않은 채 품속에서 울다 멈추기를 반복하던 아이를 야속하게 내려다보던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 시절 초보 아빠였던 나를 극적으로 위로해주던 시 한 편을 만났더랬다. 바로 지난 10월 사상 처음 한국인으로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시 ‘괜찮아’다.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한강의 ‘괜찮아’ 중에서)

아이도 위로하고 나도 위로하듯 계속 되뇌던 말. 다그치는 게 아니라, 채근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툭 하고 던진 ‘괜찮아’란 말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공감으로, 또 위로로 다가왔었던 것 같다. 스마트폰 메모장에 저장해 뒀던 한강의 시를 메시지창에 붙여 육아 후배인 그에게 보냈다.

10여분이 지났을까. 짧은 응답이 돌아왔다. ‘이제 괜찮네요. 아기도 저도. 고마워요.’ 누군가의 상처와 아픔, 고민이 다른 이의 그것과 찐하게 마주할 때, 오직 나만 그 상처와 아픔과 고민에 갇혀 있다고 착각했던 세계에서 한 걸음 벗어날 수 있다.

최기영 미션탐사부 차장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