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중국에 계시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비상계엄 사태로 밤잠을 설치다 출근한 베이징의 한 교민이 중국인 직원에게서 들은 얘기다. 한국 상황이 걱정돼 한 말이겠지만, 그는 “중국에 살면서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해외 교민들은 대부분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적 안정에 자부심을 품고 산다. 맹목적 애국심이 아니다. 아시아에서 한국만큼 민주주의가 깊이 뿌리 내린 나라는 드물다. 때로 극한 대립을 보이면서도 평화로운 정권 교체의 전통을 쌓아온 것 역시 귀한 자산이다. 권위주의 사회인 중국과 대비하면 한국 민주주의의 우월성은 더 돋보인다. 그 자부심이 윤석열 대통령의 헌정질서 유린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이번 사태로 국민이 입은 유무형의 손실은 너무나 크다.
한국의 비상계엄 사태는 중국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가까운 이웃나라에서 심야에 갑자기 벌어진 일인 데다 중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사건의 연속이었다. 비상계엄 선포, 군병력 국회 난입, 해제요구안 결의, 탄핵소추안 발의·부결, 현직 대통령 출국금지 등 전개 과정도 드라마틱했다.
“대하드라마를 하루에 한 편씩 보는 것 같다”는 댓글이 중국인의 시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중국에서 불법 유통돼 인기를 모은 영화 ‘서울의 봄’을 떠올린 이도 많았다. 중국 당국도 보도나 여론을 통제하지 않았다. 관영 언론들은 지체 없이 속보를 내보내며 시간대별 타임라인까지 정리해 보여줬다.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와 소셜미디어 웨이보에선 주요 뉴스가 새로 나올 때마다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올랐다. 계엄을 선포하는 영상, 국회에서 군대와 의원·시민들이 대치하는 모습, 대통령 퇴진과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 영상들은 중국어 자막과 함께 편집돼 많은 조회수를 올렸다.
중국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거나 친미반중 성향의 윤 대통령 몰락에 환호하는 이도 있지만, 대체적인 반응은 아직 ‘놀랍다’ ‘충격적이다’에 가깝다. 국가 최고 권력자가 한순간에 몰락하는 이번 사건이 중국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는 시간이 더 흐른 후에 드러날 것 같다.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들은 비상계엄 사태가 충격적이라면서도 한국 민주주의의 저력에 대한 두터운 신뢰를 보여줬다. 중국과 비교해 다당제와 삼권분립 등 서구 민주주의는 비효율적이고 불안정하다는 점을 앞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외였다.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글로벌전략연구소 왕쥔셩 연구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은 수십년간 민주헌정이 국민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한국인은 민주주의에 대해 공감대를 갖고 있어 평화 시 계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상하이 대외경제무역대학 잔더빈 교수도 “오늘날의 한국인은 40년 전과 다르다. 민주주의 인식이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면서 “민주화를 쟁취한 60세 전후 세대는 좌파든 우파든 계엄을 용납할 수 없고 젊은 세대는 더하다”고 말했다. 리자청 랴오닝대 국제경제정치학원 교수는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국회와 국민 저항 아래 정치상황이 빠르게 정상화되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견고함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모두 한국을 오래 연구한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이다.
윤 대통령에 대한 반감도 일부 작용했겠지만, 체제와 이념이 다른 중국 전문가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저력을 높게 평가한 점은 고무적이다. 이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헌법과 법률에 따라 신속하고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만이 국가적 자부심을 회복하는 길이다.
송세영 베이징 특파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