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는 1995년부터 일반인 대상 공모 절차를 거쳐 한 해를 상징하는 ‘올해의 한자’를 한자의 날(12월 12일)에 공개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일본 내 증세 논의가 활발했던 것을 보여주듯 ‘세(稅)’가 선정됐다. 한국과 관련된 올해의 한자도 있어 이채롭다. 2000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을 의미하는 ‘김(金)’이, 2017년에는 북한의 잇단 도발과 핵실험을 보여주는 ‘북(北)’이 뽑혔다. 중국, 대만에서도 ‘올해의 한자’가 선보이고 있다.
2001년 11월 교수신문 편집회의에서 ‘올해의 한자’같은 작업을 해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다만 한 글자가 아닌 사자성어를 고르기로 했다. 전국의 대학교수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형식을 취했다. 그해 첫 ‘올해의 사자성어’는 ‘오리무중(五里霧中)’. 9·11 테러, 김대중정부의 각종 게이트 등 혼돈스러운 한 해를 반영했다.
어느덧 ‘올해의 사자성어를 보면 한 해가 보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게감이 커졌다. 2008년의 사자성어는 미국산 쇠고기 파동 당시 정부 대처 방식을 꼬집는 ‘호질기의(護疾忌醫·병을 숨기면서 의사에게 보이지 않는다)’다. 2020년의 아시타비(我是他非·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문재인정부의 내로남불 행태를 한문으로 옮긴 조어다.
지난 9일 공개된 2024년 사자성어는 ‘도량발호(跳梁跋扈)’다.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라는 뜻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파문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번 설문은 지난 2일 마감돼 3일의 계엄 상황을 반영하지 못했다. 계엄 외에도 김건희 여사, 명태균씨 등의 국정농단 의혹으로 나라가 시끄러웠다는 얘기다. 2, 3위로 뽑힌 후안무치(厚顔無恥·낯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다), 석서위려(碩鼠危旅·유식한 척하는 쥐 한 마리가 국가를 어지럽힌다)’ 역시 현 정부의 행태를 꼬집었다. 24번의 올해의 사자성어 중 23번이 부정적 의미였다. 21세기 한국 사회가 평안하지 못한 셈인데 결국 정치의 실패에 기인한다.
고세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