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작은 새를 구하는 마음

입력 2024-12-11 00:31

“국민일보입니다. 원고마감 12월 10일(화) 오전 10시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달도 어김없이 원고마감을 알리는 문자가 도착했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지만, 도대체 이런 시국에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의 글을 써내려가는 것이 멋쩍고 사치스럽게만 느껴진다.

“엄마!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어!” 며칠 전 학원에 갔다 밤늦게 귀가한 아들이 소리쳤다. “뭐? 계엄령?” 북한이 도발한 것일까 걱정되는 마음에 얼른 뉴스를 틀어보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대학 때 헌법 교과서에서 보았던 계엄의 요건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SNS는 계속 화면 속에서 동그라미만 돌며 접속 오류가 났다.

그러다 한 SNS에 현황을 알리는 글들이 속속 올라왔다. 의원들이 국회로 달려가고 있다. 국회 앞에 경찰이 깔려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의원 신분증을 확인하고 들여보내준다고 하더니 곧이어 다시 들여보내주지 않아 담장을 넘고 있다. 무장 군인들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했다. 보좌관들과 시민들이 스크럼을 짜고 군인들의 진입을 막고 있다. 급박하고 긴장되는 순간들을 글과 영상으로 실시간 접하며 손에서 진땀이 났다.

다행히 2시간여 만에 국회 본청 안으로 입장한 190명의 의원들이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후에도 대통령이 계엄 해제를 하지 않거나 군대가 해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결국 군대는 자진 해산했고, 대통령도 새벽에 계엄 해제를 선포했다. 그제야 긴장을 풀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뜬눈으로 날밤을 새우고 출근한 그날도 나는 작은 조정실에서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소송으로 법원까지 온 사람들은 대개 극단적인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다. 아파트 보증금을 떼인 청년 임차인, 장사가 되지 않아 빌린 물건값이 밀리고 사업을 인수할 사람도 구하지 못해 건물주로부터 소송을 당한 자영업자, 큰돈을 번다는 광고에 넘어가 노후 자금을 투자했다가 원금도 찾지 못하고 있는 어르신…. 코로나19 시국보다 더 경제 상황이 어렵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즈음이다.

2024년에 군인들이 국회로 진입하고, 시민들과 몸싸움을 벌인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음에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위해 힘들게 일상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다. 어찌 보면 우리 국민은 내우외환의 산불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은 이 불을 끄기는커녕 정적을 향한 증오로 분노의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다가 오히려 더 큰불을 일으킨 형국이다.

문득 몇 해 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발생한 대규모 산불 기사가 떠올랐다. 무서운 속도로 불이 번져가는 위급한 현장에서 한 소방관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작은 새 한 마리를 구조했다는 이야기다. 소방관은 불에 깃털이 타들어가 날아가지 못하고 있던 새를 품에 안은 채 산을 내려왔고, 다행히 새는 극적으로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과 여야 및 계파를 불문한 정치인들에게 묻는다.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부디 정적을 바라보기보다는 눈을 돌려 어려움에 처해 있는 국민들을 바라보기 바란다. 죽어가는 작은 새를 구하는 소방관의 심정으로 말이다. 각자 자신의 당리당략을 계산하며 입지를 다지는 동안 국민들은 불속에서 깃털이 타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중에서)

안지현 대전고법 상임조정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