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단단한 내일

입력 2024-12-11 00:32

허구보다 더한 일 벌어져
소설은 수정할 수 있지만
역사는 고쳐쓸 수 없는 것

8년 전 이야기다. 바야흐로 본격 문학이 인기를 잃고, 그 자리를 웹소설이 대체하던 시기였다. 그 변화의 물결 아래 내게도 웹소설 연재 청탁이 왔다. 이참에 웹설가로 거듭나고자 야심차게 작품을 구상했다. 그리하여 쓰기로 한 것은 블랙코미디풍의 정치소설.

주인공은 사학과 출신의 지성 넘치는 청년이지만 단군 이래 최악의 취업난에 부딪혀 백수로 지낸다. 그는 간간이 아르바이트 삼아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역사 강사를 하며 지내는데, 당연히 주머니 사정이 좋을 리 없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낙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강의 후 ‘어머님 수강생’들이 사주는 시원한 맥주 한 잔. 그렇다. 그는 ‘맥주 덕후’인 것이다.

생활비, 아니 맥줏값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그는 선거철만 되면 여·야당 가리지 않고 유세장에 간다. 일당도 짭짤하거니와 운만 좋으면 뒤풀이에서 시원한 맥주를 얻어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인간의 삶이 마음먹은 대로만 풀리는가. 어느날 공짜 술 생각에 야당 유세장에 간 주인공은 정치적 불만에 가득 찬 시민과의 논쟁에 휘말리고 만다. 그리고 그때, 주인공의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정치적 혜안이 박진감 넘치는 토론과 함께 드러나고, 그 장면은 고스란히 SNS에 올라가 그는 일약 스타가 된다.

이제 주인공은 이듬해 보궐선거에 청년 후보로 나서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 입성한다. 이리하여 이 인물이 마침내 한국의 썩은 정치판을 개혁하는 국회의원으로 활약하는가 싶겠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저 맛있는 맥주를 마시는 데만 관심이 있다. 한데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한다. 그에게 한국 맥주는 너무나 맛이 없었다. 주인공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한국 맥주를 맛있게 만들기 위한 법안을 발의한다. 독일의 맥주순수령과 같은 걸 기대하며. 하나 이때부터 또 문제가 터진다. 우리나라의 주세법은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기업의 로비로 소비자 중심이 아닌 기업 중심 법안이었던 것이다. 이에 주인공은 정경유착을 타파하기 위해 새로운 법안을 발의하는데, 그게 또 끝이 아니었다.

적폐로 우리 사회 곳곳의 부패와 부조리가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결국 주인공은 ‘맛있는 맥주 하나를 마시고 싶었을 뿐인데’ 한국 사회 전체를 뒤바꾸는 인물이 된다. 그 과정에 대통령의 비리까지 파헤치고, 이로 인해 대통령은 탄핵을 당한다. 어수선한 정국이 수습될 즈음 주인공은 홀로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마침내 맛있는 맥주 한 잔을 마신다. 그리고 그때 그가 유력 대선후보로 떠올랐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그런데 이 소설을 약 75%까지 써놓고 결국 폐기했다. 누구나 알 듯이 이듬해 우리는 탄핵 정국을 맞은 것이다. 현실이 소설보다 더 긴박한데, 대체 누가 소설을 읽겠는가.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본다. “이러다 소설가 다 굶어 죽는 것 아니에요?” 맞다. 시국이 혼란하면 소설가는 밥벌이를 못 한다. 소설가의 상상력을 뛰어넘고, 상식을 무시하는 사건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탓이다. 마침 오늘은 얼마 후 출판할 책의 교정지를 받은 날이다. 이럴 때 책을 내는 건 망하는 일이지만 원고 교정을 하며 다른 생각이 들었다. 원고를 수정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우리는 역사를 수정펜으로 지울 수도, 고칠 수도 없다. 시민에게 위정자가 쓴 역사는 폭력적으로 몸과 정신에 새겨진다. 하지만 낙담 않기로 했다. 신은 부끄러운 어제를 맞이한 우리를 위해 내일을 준다고 믿는 덕이다. 떨쳐버리고 싶은 어제는 더 단단한 내일을 쓰고픈 염원으로 작용한다. 바보를 가리키는 영어 ‘idiot’은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한다. ‘사사로운 마음만 있고 공적이고 정치적인 것에 관심 없는 자’라는 것이다. 비록 곧 낼 책은 망하더라도, 적어도 바보처럼 살지만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최민석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