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법한 지시를 어떻게 따릅니까.” 2013년 10월 22일 국회 법사위에 나와 이렇게 말하던 검사 윤석열을 기억한다. 국가정보원의 댓글 작성 의혹 수사 중 제기된 외압 논란과 항명 사태에 내놓은 항변이었다.
10여년이 흐른 2024년 12월 3일 대통령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사흘 후 홍장원 국정원 1차장은 국회를 찾아와 윤 대통령이 “싹 다 잡아들여 정리하라”며 정치인 체포를 지시했다고 폭로했다. 윤 대통령의 위법한 지시를 차마 따를 수 없었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윤 대통령은 ‘법치주의’를 국정 운영의 근간으로 삼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특검 수사를 이끌었고, 문재인정부 검찰총장을 지내면서 누구보다 국가권력이 어떻게 오남용되는지 지켜본 사람이다. 법을 잘 알고, 권력의 약함도 지켜본 대통령이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걸까. 권력은 힘이 세서, 권력을 쥔 인간의 인격조차 쉽게 바꾼다지만 법조인 출신 윤 대통령의 이런 몰락은 그래서 더 충격적이다.
정치는 아무리 듣기 싫은 소리만 하더라도 상대 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소통하며 설득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유례없는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 새해 예산안 처리를 위한 국회 시정연설 불참이 반복되면서 짐작은 했다. 매번 정치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안 앞에서 법 위반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모습을 보면서 국민 마음을 헤아리는 정치인보다 검사 정체성을 버리지 못했구나 생각도 했다. 그렇더라도 야당을 때려잡아 처단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대통령의 속내를 계엄을 통해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 직후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위법·위헌적 비상계엄을 막아낼 것”이라고 했다. 여당 대표라는 정체성보다 오랜 법조인 정체성이 우선 작용한 듯, 누구보다 신속하게 법적 판단을 내렸다.
그의 판단대로 대통령의 위헌적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 탄핵 사유가 분명하다는 것이 헌법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하지만 반전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한 대표는 정작 탄핵은 못 하겠다며 국회 본회의 표결을 거부했다. 그보다 더 이해 못 할 선택은 한덕수 국무총리와 내놓은 ‘2인 국정 운영 구상’이었다. 헌법학자들은 하나같이 헌법과 법률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위헌적 발상이라고 했다.
서초동에서 여의도로 왔지만 한 대표는 여전히 무엇이 위법한지 심판하는 데 민첩한 ‘똑똑한 법률가’ 같다. 하지만 정치인은 자기가 내린 결정을 국민 앞에 정직하게 내놓고, 반대와 비판에 부딪히더라도 설득하며 책임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헌법 가치를 수호하고 국민의 삶을 우선하기보다 정파의 유불리 셈법을 따지는 모습으로는 국민의 지지를 계속 받기 어렵다.
지금 상황은 한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법조인, 특히 검사 출신 정치의 종말을 고하는 듯하다. 기성 정치에 신물 난 국민에게 법과 정의, 공정과 상식을 바로 세우겠다는 이들의 메시지는 한때 환영받았다. 하지만 이제 국민은 안다. 그들이 휘두르는 칼은 상대방을 향할 때만 날카로웠지 자기편엔 무디고 무딜 뿐이라는 걸.
정치를 쉽게 생각한 이들에게 정치의 자리를 내주고,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국민의힘도 다시 심판대에 섰다. 여야 협치의 실종에도, 당내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의 위기에도 이들은 ‘친윤’ ‘친한’이라는 울타리 밑에서 열성 지지층만 바라보며 권력을 잡을 기회만 엿봤다.
이번 사태에서도 국민의힘은 탄핵이 ‘보수의 궤멸’로 이어질 것이라며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원의 권리와 의무를 외면했다. 당이 그런 결정을 내리는데 나름의 역할을 한 것이 율사 출신 중진 의원들이었다. 법조인 출신 보수 정치인들만의 몰락으로 그칠까. 그토록 두려워하는 보수 궤멸로 이어질까. 갈림길에 서 있다.
김나래 사회부장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