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근무하는 국립수목원은 조선시대 왕실 부속림으로 지정된 후 560여년 동안 숲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는 광릉숲에 위치하고 있다. 광릉숲은 17세기 소빙하기를 비롯해 수많은 계절을 거쳤으며, 식물들은 햇빛과 온도에 따라 주기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계절현상을 나타내 왔다. 그렇게 광릉숲은 수백년의 세월 동안 천천히 생태적 적응을 하며 지금의 온대중부낙엽활엽수 극상림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상기후에 광릉숲 내 식물들도 동요하고 있다. 유난히 따뜻했던 올해 가을, 평년에 비해 5일 이상 늦게 물든 지각 단풍과 함께 봄꽃들이 피어나는 불시개화와 조기 개엽 현상이 곳곳에서 관찰된 것이다. 보통 3~4월 개화하는 산철쭉, 라일락, 풍년화 등 20여종의 나무가 9월 말~10월에 꽃을 피웠다. 일반적으로 봄에는 개나리, 벚꽃, 철쭉의 순서로 피지만 이번 가을 국립수목원에서 관찰된 꽃들은 몇 송이만 힘겹게 핀 꽃과 나무 전체가 만개한 이례적인 모습도 함께 관찰됐다. 순서도, 양도 일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5월에 꽃이 피는 노박덩굴과 빗살나무, 여름수국도 10월 말 꽃을 피웠다. 느티나무와 비술나무 등은 낙엽이 다 떨어지기 전 연두색 신엽을 드러내며 낙엽과 신엽이 공존하는 현상도 관찰됐다. 급기야 예전 그림으로만 볼 수 있던, 꽃과 열매 그리고 단풍을 한장의 사진에 담을 수 있게 됐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2년간 영국은 11월에 피어나는 두 번째 개화인 ‘제2의 봄(second spring)’, 호주는 겨울인 7월에 봄 현상이 나타나는 ‘계절에 맞지 않는 식물행동(unseasonal plant behavior)’, 인도는 10월의 비정상적인 개화를 언급하는 ‘철 지난 개화(off-season flowering)’라는 내용으로 식물의 계절 혼란을 소개하고 있다.
최근 한 미국 학자는 같은 종 내에서도 암나무와 수나무의 개화 시기가 달라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개화의 시기 차이로 수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 종은 멸종하거나 다른 종과의 교잡을 통해 새로운 종을 나타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긴 진화의 과정이 아닌 한 세대에 이 같은 나무의 선택을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기후 변화에 따른 생태계 변화는 이미 서로 영향을 끼치며 가속화되고 있다. 생물다양성의 위기는 기후위기만큼 체감되기 어렵지만 생물종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는 만큼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다. 식물이 보내는 신호는 생태계 균열에 대한 경고다. 지난달 말 폭설에 파묻힌 단풍나무는 아름다웠지만 이를 보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더 늦기 전에 이상기후에 따른 식물의 반응 원인을 진단하고, 뒤따르는 생태계와 생물다양성의 위기를 극복할 해결책을 찾기 위한 연구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임영석 국립수목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