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해외 순방에 경제사절단으로 자주 동행한 한 대기업 임원은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해제 사태로 재계가 한시름 놓은 게 적어도 하나는 있다고 농을 던졌다. 탄핵 갈림길에 선 윤 대통령이 국정운영 2선 후퇴 수순을 밟으면서 외교 무대에서도 사라지면, 순방 공식 행사가 끝난 뒤 밤 10시쯤 “어디 호텔 스위트룸으로 총수를 데려오라”는 통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은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농담이었는데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해외 순방 때마다 시간이 남으면 재계 총수와 통음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음주를 즐기는 일부 총수도 대통령 술 사역은 내키지 않았을 테고 가끔 뒤탈이 나 구설에 올랐으니 권력과의 불편한 동행은 긴장의 연속이었을 것 같다. 앞으로 윤 대통령이 해외 순방길에 올라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재계 총수와 회동하는 장면은 볼 수 없게 됐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8일 대국민 담화에서 윤 대통령의 ‘질서 있는 조기 퇴진’을 언급하면서 “퇴진 전이라도 대통령은 외교를 포함한 국정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를 뒷받침했다.
그동안 권력 앞에 쉬쉬할 수밖에 없었던 재계에서 털어놓는 해외 순방과 관련한 뒷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대통령 해외 국빈방문과 연계해 경제단체가 돌아가면서 주관하는 부대 행사 ‘비즈니스 포럼’ 준비 절차도 역대 정부와 비교하면 가장 힘들고 돈이 많이 든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대통령실에서 요구하는 의전 강도가 워낙 세 신경 쓸 대목이 많고 제반 비용은 3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전언이다. 어느 나라에서는 대통령실 의전 라인의 갑작스러운 지시로 딱딱한 일반 의자 대신 고위층이 앉을 푹신한 소파를 구하느라 진땀을 뺀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행여나 행사 진행에 대한 박한 평가를 받을까 부담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컸다. 어찌 됐든 재계에서 만연했던 ‘순방 스트레스’는 끝이 났으니 해방감을 느낄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권력의 공백은 재계 입장에서 더 큰 불확실성으로 다가온다. 그동안 국내 경제가 정권의 입맛에 따라 정치와 밀접하게 얽혀 성장한 탓이다. 정국이 불안정하면 경제 정책이 동력을 잃고 표류할 수밖에 없고 기업의 주요 사업도 차질을 빚을 공산이 커진다. 국회가 대통령 탄핵에 화력을 집중하면서 이미 주요 경제 법안 심의는 뒷전으로 밀렸다.
이번 사태로 여야가 둘로 더 선명하게 쪼개지면서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반도체 특별법)과 상속세제 개편안 등 갈등이 첨예한 법안은 앞으로도 합의 처리를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반도체 특별법에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주52시간 근무 예외) 조항을 넣으려고 사활을 걸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최악보다 더 최악을 가정해 생존 전략을 다시 짜야 하는 처지다. 내년 초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맞춰 시나리오별 대응을 구상 중이던 재계는 비상계엄이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국내 변수가 더해지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비상경영 고삐를 조이는 모습이다.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으로 정치적 불안이 이어지며 원·달러 환율은 지난 일주일 동안 24.5원이나 뛰며 1400원대에서 움직이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내년도 경영 계획안에 넣은 환율 밴드 예상치가 무의미해졌다.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우리는 정국 혼란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기약할 수 없다는 데 더 참담함을 느낀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 재계가 바라는 것은 경제와 정치가 각자의 영역에서 균형 있게 돌아가는 선진 시스템일 것이다.
김혜원 산업1부 차장 ki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