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몸에서 채취한 면역세포 활용
암세포 죽이고 건강한 세포는 보호
서울대병원, 시간·비용 절감 시스템
이건희 기부금으로 소아 8명 완치
조혈모세포 이식 부작용도 최소화
내년 상반기부터 무상치료 확대도
암세포 죽이고 건강한 세포는 보호
서울대병원, 시간·비용 절감 시스템
이건희 기부금으로 소아 8명 완치
조혈모세포 이식 부작용도 최소화
내년 상반기부터 무상치료 확대도
올해 열 살인 채윤희양은 4년 전 혈액암의 일종인 ‘급성림프모구백혈병’(ALL) 진단을 받았다. 춘천에 사는 엄마 조영미(45)씨는 “잘 뛰어놀던 아이가 갑자기 어지럽다고 하더니 코피를 쏟았다. 코피는 한동안 멎지 않았고 이후 얼굴에 빨간 출혈성 점들이 돋아나 급히 인근 소아청소년과를 찾았다”고 했다. 의사는 피 검사 수치가 이상하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권했다. 2020년 봄 서울대병원에서 ALL 판정을 받고 곧바로 표준 항암치료를 시작해 2022년 10월까지 힘든 투병을 견뎌냈다. ALL은 항암치료를 완료하면 80~90% 회복되지만 10~20%에서 재발 위험이 있다.
안타깝게도 채양은 1년6개월만인 지난 4월 병이 재발했다. 다시 항암치료에 들어갔으나 미세잔존질환 검사에서 지속적으로 백혈병 양성이 나오며 항암제가 더 이상 듣지 않았다. 이제 남은 방법은 조혈모세포(골수) 이식이 유일했다. 그런데 조혈모세포 이식은 골수에서 병든 세포를 청소하고 건강한 세포가 새로 만들어지도록 고용량의 항암제 투여나 전신 방사선 치료가 선행돼야 한다. 아이에겐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밖에 없다. 조씨는 “이식으로 인해 영구 불임이나 탈모 같은 부작용도 따른다고 해 고민이 컸다”고 했다.
포기해야 하나 싶은 순간에 새로운 희망의 손길이 다가왔다. 주치의가 서울대병원이 자체 개발한 ‘카티(CAR-T) 치료’를 시도해 보자고 한 것. 카티 치료는 환자 몸에서 ‘면역 T세포’를 뽑아 암세포만 공격하게 유전자 조작(T세포 표면에 암세포의 특정 항원을 인지하도록 유전 정보 주입)을 한 뒤 환자에게 다시 주입하는 맞춤형 치료법이다. 주입된 카티는 암세포만 골라 죽이고 건강한 세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카티 원리로 개발된 첫 치료제가 2017년 등장한 ‘킴리아’다. 기존 항암제가 듣지 않아 더는 기댈 곳 없는 불응성, 재발성 혈액암 환자들에게 1회 투여만으로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 ‘기적의 항암제’로 불렸다. 이후 비슷한 원리로 개발된 카티 치료제는 6개로 늘었다. 킴리아는 2021년 3월 국내에도 도입됐고 이듬해 4월부터 건강보험이 적용돼 고가의 약값 부담이 줄었다.
다만 킴리아 치료를 받으려면 환자에게서 추출한 T세포를 해외로 보내서 카티 치료제로 제조 후 냉동 상태로 다시 국내로 항공 운송해 와야 한다. T세포 채취부터 투입까지 4~6주가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든다.
국산 카티 치료, 무상 제공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병원이 직접 카티를 생산해 치료 시간을 단축하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국내 의료기관 최초로 구축했다. 병원은 2022년 4월 첫 환자에게 국산 카티를 성공적으로 투여하며 임상 연구를 시작했다. 해당 연구를 통하면 환자의 T세포 채취→카티 제조→투여까지 12일밖에 걸리지 않는다. 임상 연구인 만큼 환자의 비용 부담은 없다.
올해 4월부턴 든든한 민간 지원군까지 얻어 환자들의 ‘토종 카티’ 치료 혜택이 확대됐다.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유족이 서울대병원에 기부한 3000억원으로 꾸려진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사업의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소아·청소년 ALL 환자 8명이 이를 통해 카티 치료를 받았다. 모두 병이 완전히 치료됐으며 특별한 합병증 없이 일상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앞서 채양도 이건희 기부금 지원으로 지난 10월 카티 치료를 받았고 한 달 뒤 1차 골수 검사에서 “백혈병 세포가 사라졌다. 깨끗하다”는 소견을 들었다. 지난 3일 2차 골수 검사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는 엄마 조씨는 “그동안 항암치료 등으로 1000만원가량 들었다. 환자와 가족들에게 치료비는 현실적 문제인데, 기부금으로 환자 부담을 덜어주고 치료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줘 얼마나 다행이고 희망을 주는지 모른다”며 고마워했다. 조씨는 “카티 치료 후 아이의 컨디션이 좋아졌고 무엇보다 힘든 항암치료를 받지 않아 다행이다. 이제 윤희는 먼저 진료실로 씩씩하게 들어가 주치의 선생님과 스스럼없이 장난을 칠 만큼 밝게 지낸다”며 웃었다.
채양이 경험한 급성림프모구백혈병은 소아암 중 가장 흔한 형태로, 국내에서 매년 약 200명이 새로 발생하고 있다. 기존의 항암치료로 생존율이 높아졌지만 재발하거나 치료에 불응하는 환자들의 생존율은 여전히 10~30%로 낮은 실정이다. 이들에게 유일한 옵션은 조혈모세포 이식이지만 심각한 부작용이 따른다는 게 문제다. 서울대병원 강형진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9일 “조혈모세포 이식 치료는 기존 항암 치료보다 성적이 좋지만 미세잔존 백혈병 양성 상태에서 이식하면 재발 위험이 크고 치료 자체의 독성으로 인해 영구 불임이나 탈모, 폐 기능 저하 등의 심각한 합병증이 초래돼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이유로 근래 소아백혈병에는 가급적 조혈모세포 이식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조혈모세포 이식이 마지막 선택지인 재발성, 불응성의 소아청소년 ALL 환자들에게 부작용을 최소화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 카티 치료다. 이런 고위험군 ALL 환자에서 카티 치료는 생존율을 약 60%로 높이는 효과가 입증됐다. 강 교수는 “특히 의약품인 킴리아는 조혈모세포 이식 후 재발하거나 3차 재발한 경우 등 병의 진행상 뒷 단계에서 쓸 수 있는 데 반해, 우리의 카티 치료는 그보다 앞단 즉, 조혈모세포 이식 전에 적용해 치료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내년 3월, 빅4 병원 환자로 혜택 늘려
내년 상반기부터는 이런 토종 카티 치료의 혜택을 다른 병원 환자들도 무상으로 받을 수 있을 전망이다. 서울대병원은 다기관 임상 연구로 확대해 서울아산과 삼성서울, 서울성모, 세브란스 등 4개 대학병원에서 치료 중인 약 50명의 ALL 환자에게도 자체 생산 카티를 제공하기로 했다.
강 교수는 “T세포 채취는 서울대병원에 와서 하되, 생산된 카티의 투여는 환자가 치료받는 병원에서 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며 “보건복지부 승인 과정을 거쳐 내년 3월쯤부터 진행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내년 2월 시행되는 개정 첨단재생의료법에 ‘치료’ 개념이 도입된 것도 의약품(킴리아 등)이 아닌, 병원 시행 ‘카티 치료’ 임상 연구를 활성화하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강 교수는 카티를 얼리지 않고 신속하게 투여하는 게 원칙이라 우선은 이게 가능한 서울 주요 병원 환자에게 제공하고 다른 지역 병원의 치료 환자에 공급 여부는 향후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
강 교수는 “카티 치료 임상 연구를 통해 조혈모세포 이식 전에 카티를 먼저 투여해 백혈병 세포를 완전히 없애고 이식을 진행함으로써 치료 성적을 향상시키거나, 가능하다면 이식을 대체해 환자들이 평생 큰 합병증 없이 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글·사진=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