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문화] “누구에겐 하찮은 1승… 얼마나 우주 같은지 보여주고 싶었다”

입력 2024-12-09 00:53
신연식 감독은 남들은 쉽게 지나치는 곳에 시선을 던져 카메라에 담아낸다. 300만원으로 독립영화를 찍기도 했던 신 감독은 “영화에서 김우진 감독이 하는 대사들이 제가 스스로에게 하는 얘기에 가까웠던 것 같다”며 “‘남들은 10승, 20승 쉽게 하는데 나는 한 번 이기는 게 이렇게 힘드냐’는 대사를 쓰며 울었었다. 응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도 제게 한 말이었다”고 말했다. 키다리스튜디오 아티스트유나이티드 제공

많은 사람은 과정보다 결과만을 바라본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왜, 어떻게 그 자리에 오르게 된 건지 그 과정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신연식 감독은 자신만의 시각으로 ‘무엇을, 어떻게, 왜’에 주목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것, 쉬이 지나치는 것에 시선을 두고 카메라에 담아온 신 감독은 이번엔 영화 ‘1승’을 통해 남에겐 찰나지만, 나에겐 우주와도 같은 한순간이 바꿔놓는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신 감독은 “결과만 놓고 보면 누구는 이겼고, 누구는 졌다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우주 같은 순간에 누군가의 운명이 확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왜 바뀌는지에 관심이 없다”며 “배구공을 때리는 0.5초의 순간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누군가의 하찮은 1승이 얼마나 우주 같은지, 그걸 쟁취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는지, 그냥 ‘열심히 해서 이겼다’가 아니라 ‘왜, 어떻게’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를 통해 개개인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각자의 1승에 대한 응원을 담으려 했다”고 말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1승’은 이겨본 적 없는 감독 김우진(송강호)과 그가 이끄는 승리 가능성 ‘제로’인 프로 여자배구단 핑크스톰, 그들의 1승에 우승상금 20억원을 건 괴짜 구단주 강정원(박정민)이 1승을 위한 도전에 나서는 과정을 담았다. ‘1승’은 처음으로 영화에서 배구를 소재로 다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신 감독은 “배구가 구현하기 정말 어려운 스포츠”라며 “지금까지는 영화적 기술이 배구 경기를 구현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기술이 발달해서 구현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도 안 했길래 내가 얼른 해야겠다 싶었다”고 웃었다.

영화는 기존의 스포츠 영화들이 쉽게 빠져들곤 했던 신파를 최대한 걷어내고 속도감 있는 배구 경기에 몰두했다. 빠르게 네트 위를 오가는 배구공의 움직임을 카메라가 역동적으로 담아내 실제 경기를 보는 듯 몰입하게 된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3분여에 달하는 긴 랠리 장면은 영화의 가장 큰 묘미다. 놀이공원에서 짜릿한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 느껴지는 연출로, 경기 결과를 볼 땐 절로 탄식이 터져 나온다.

이 장면은 두 달 동안 안무를 연습하듯 극 중 핑크스톰 선수들이 공을 주고받는 연습을 한 결과이다. 촬영 역시 6대의 와이어캠을 설치하고 날아가는 공을 360도 촬영으로 담아내는 등 공을 들였다. 한 명이라도 NG가 나면 다시 처음부터 촬영해야 할 만큼 난도가 높은 장면이었지만, 첫 시도에 성공했다. 신 감독은 “모니터 6개를 보면서 조마조마했는데 첫 테이크에 오케이가 났다. 내가 이런 위험을 즐기는 성격이었나 싶다”며 웃었다.

‘1승’은 생생한 경기 장면뿐 아니라 경기의 작전을 세우고 연습해 실행에 옮기는 과정도 세세하게 담아냈다. 신 감독은 “(신파를) 철저히 배제했다.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기분 좋게 나오길 바랐다”며 “‘1승’이 가진 변별점이 ‘왜, 어떻게, 무엇을’ 열심히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김우진 감독이) 전략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우는지, 그 준비 과정도 상세히 보여주려 했다. 그냥 나오는 결과라는 건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이 영화의 매력은 실감 나는 경기 장면뿐만 아니라, 밖에서는 패배자로 손가락질받던 인물들이 서로의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며 ‘한 팀’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려낸 점에도 있다. 선수 대기실에서 담배를 피우다 불을 냈다는 선수 얘기를 듣고 정원은 “전자담배를 지급하라” 하고, 남의 눈치를 너무 봐서 주눅 들어있는 선수에게 “그게 네 장점”이라며 “단점과 장점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거”라고 말하는 우진의 모습에서 신 감독이 가진 태도가 드러난다.

그는 “핑크스톰이란 팀의 구성원은 다 단점이 있는 사람들이다. 구단주도, 감독도 그렇고,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이 팀의 모든 선수는 다른 팀에 있을 땐 그들의 단점으로 욕을 먹었었다”며 “모두 단점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여기선 서로의 단점을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묘하게 보완해주면서 강팀을 이기는 것,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정확히 이 구조 안에 있다”고 말했다.

신 감독과 송강호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거미집’에 이어 지난 5월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된 시리즈 ‘삼식이 삼촌’, 그리고 ‘1승’까지 벌써 세 번째 호흡을 맞췄다. 같은 날 만난 송강호는 신 감독이 작품에 담아내는 묘한 시선에 매료됐다고 했다.

송강호는 “‘동주’란 영화를 봤다. 우리 모두 윤동주 시인의 시는 기억하지만 그분 삶의 뒤안길, 발자취는 잘 모르지 않나. 근데 그런 시선을 담아 역사의 아픔을 끄집어내는 그 시선이 좋았다”며 “배구란 스포츠가 처음 영화화된다는 것에서부터 그의 시선이 가닿은 게 아닐까. 그리고 ‘1승’의 인물은 모두 허점이 있고, 열심히 하고 싶지만 항상 제자리라 패배감에 젖어있다. 이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서 신 감독만의 시선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1승’은 기존의 스포츠 영화들이 쉽게 선택하곤 했던 신파 대신 짜릿하고 실감 나는 배구 경기를 담아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왜’ 해서 그 자리에 오른 건지 낱낱이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3분여의 긴 랠리는 ‘핑크스톰’ 선수들이 두달여간 연습하고, 고가의 와이어캠 6대를 동원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키다리스튜디오 아티스트유나이티드 제공

그러면서 “영화엔 실제 배구인들도 있지만, 모델 출신과 일반 배우도 있다. ‘1승’의 다양하고 입체적인 인물들이 묘한 시너지를 내서 한 팀이 되는 과정, 처음엔 오합지졸이었지만 하나씩 맞춰나가며 힘을 발휘하는 게 실제와 참 잘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런 점에서 다른 영화와는 다른 재미가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안전한 확실함보다는 새로운 시도에 이끌린다는 점에서 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신 감독은 “마흔 살까지는 실컷 이상한 짓을 하려고 했다. 그건 전혀 후회가 없다”고, 송강호는 “30년간 배우로 살며 안전해 보이는 작품을 선택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거미집’도, ‘삼식이 삼촌’도 모든 대중이 볼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이 역시 의미 있는 1승의 과정이었다고 했다.

송강호는 “제게는 ‘삼식이 삼촌’도 1승이다. 수치적인 결과를 떠나서 삼식이란 캐릭터와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가진 욕망과 야욕, 인간관계 등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새로운 접근 방식이고 도전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1승이라는 게 내가 평소엔 잘 못 했는데 집에 갈 때 자식들을 위해 맛있는 통닭 두어 마리를 사서 가는 것도 내 일상의 1승일 수 있다. 그렇게 1승이 100승, 1000승, 1만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대중에게 생소한 소재와 스토리텔링이 담긴 작품부터 대중적인 스포츠 영화까지 두루 제작해본 신 감독에게 요즘의 콘텐츠 시장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신 감독은 “세상이 너무 무섭게 빨리 변하고 있다”면서도 “주제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최근 들어 느낀다. 흔히 말하는 신파와 국뽕이 있으면 큰일 날 것 같지만, 그 요소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 것 같다”고 답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