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기괴한 대통령의 기괴한 계엄령

입력 2024-12-06 00:33

경제 강국, 한류 보유국에서
계엄이라는 초현실적 사태

야당과 전공의를 적으로 규정
사실상 자해극으로 막 내려

대외신뢰도 추락 여파 거세나
국민 성숙한 대응이
민주주의 지탱한 보루가 됐다

지난 3일 밤은 예전처럼 평온했다. 이번주 주말에 열릴 아버지 팔순 모임 일정 점검하고 이틀 후 쓸 칼럼 주제를 고민하며 자료를 찾고 있었다. 일상을 깨운 건 10시30분이 넘어 날아든 회사 단톡방 알림소리였다. ‘비상계엄 선포 속보 떴네요.’ 처음에 든 생각은 ‘웬 장난?’이었다. 의아해 하는 사이 카톡음이 쇄도했다. 곧바로 뉴스를 찾아봤다.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제목의 기사가 줄지어 나왔다. 실화였다.

나라 돌아가는 상황에 걱정이 많았다. “정치권 왜 저러냐” “경제 큰일이네” 식의 푸념은 달고 살았다. 하지만 “군인이 나와서 질서를 잡아줬으면”이란 생각을 한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남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치적 극단에 절망하지만 군인에게 의지할 수준의 나라로 여기진 않았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조화로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이 됐다. 인공지능(AI), 4차 산업혁명 경쟁에 뒤처지지 않겠다는 열망, 한류라는 최강의 소프트파워를 보유한 나라 아닌가.

계엄사령부 포고령 4호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가 눈에 들어왔다. ‘내일 회사에 가면 아들뻘 군인에게 뭘 쓰는지 알려줘야 하나’라는 부질없는 상상이 머리를 잠깐 스쳤다. 아내는 아들이 두 달 전에 제대한 것에 감사했고 아들은 2주 후 제대할 부대 동료를 걱정했다. 2024년에 맞이한 요지경이다. 비상계엄 선포는 너무도 초현실적이고 기괴했다.

기괴한 계엄령은 기괴한 대통령의 작품이다. 민주화 시대로 접어든 지금은 전쟁이 아니면 꺼내기 힘든 카드가 계엄이다. 대통령 담화문과 포고령을 살펴봤다. 야당의 잇단 국무위원 탄핵, 감액 예산안 단독 처리 등을 거론하며 ‘종북 반국가세력 척결’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이라 했다. 의료 현장을 이탈한 전공의에게 ‘복귀하지 않으면 처단’하겠다고 했다. 정치력을 발휘해 이견을 조정하고 설득할 대상을 무력으로라도 제압할 적으로 상정했다.

개인적으로 더 놀라운 건 계엄이 해제된 지난 4일 오후 당정대 회의에서 나온 윤 대통령의 발언이다. 비상계엄 선포 이유를 “거대 야당의 폭주를 알리고 경고하기 위해서”라고 전했다. 야당에 경각심 주려고 무장 군인을 동원했다는 얘기다. 계엄을 충격 요법쯤으로 여긴 듯하다. 게다가 형식적인 반성조차 없었다. 하지만 국민 10명 중 7명이 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에서 보듯 계엄 선택은 대통령의 정치 생명의 종언을 예고하는 자해극이 돼버리고 말았다. 윤 대통령이 자기 발등 찍는 일이 임기 2년반 동안 빈번했지만 이번 자폭 강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국민 신뢰라는 가장 강력한 보호막이 사라졌다.

불행한 건 자해극이 대통령 한 명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은 저출생·고령화 심화, 수출 경쟁력 약화 등으로 내년과 후년 우리 성장률을 각각 1.9%, 1.8%로 전망했다. 실현된다면 2년 연속 1%대 성장률은 처음이다. 경제의 활력을 일으킬 시기에 대통령이 자초한 악재로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다. 계엄 선포 후 이틀간 외국인은 코스피에서 7000여억원을 내던졌다. 원·달러 환율은 위기의 기준이라는 1400원선을 훌쩍 뛰어넘었다. 대통령이 주창하던 4대 개혁(의료·연금·교육·노동)의 동력은 사실상 상실됐다. 한국 경제의 표류가 길어질 듯하다.

대외 신뢰도 추락은 돈으로 셀 수 없을 정도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전 세계 민주주의의 챔피언’이라 극찬한 한국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비이성적 행동으로 단숨에 요주의 국가로 전락했다. 동맹인 미국에서 “한국 민주주의 강화에 계속 공개적 목소리를 낼 것”(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란 말이 나왔다. 신생 개발도상국에 훈수하는 투다. 태국 일부 환전소에서는 한국의 정치 불안을 이유로 원화 환전을 거부하고 있다.

막장드라마에서 그나마 희망적인 건 시민, 군, 경찰의 성숙한 대응이다. 계엄 선포 소식이 나오자마자 시민들이 시내로 나와 평화시위를 벌였고 국회를 에워싸며 민의의 전당을 보호했다. 흥분해 경찰과 충돌하거나 억지로 국회에 진입할 수 있었지만 끝까지 질서를 지켰다. 계엄군은 가급적 시민과의 충돌을 피하려 애를 썼다. “왜 부끄러움은 우리 몫이냐”고 외친 국민들이 리더의 오판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민주주의를 보여줬다.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