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12월 8일]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신 사랑의 하나님

입력 2024-12-08 03:01

찬송 : ‘예수 사랑하심은’ 563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요한일서 4장 7~12절


말씀 : 어제 우리는 마태복음의 성탄 기사 결론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임마누엘)이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라는 사실을 살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성경 구절일 것입니다. 그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사람들을 옭아매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그분의 사랑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요한은 본문(10절)에서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교인이 되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그분과 사랑의 관계로 초청하십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로 인해 멸망하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다는 개념은 인간의 논리와 경험으로 담아낼 수 없는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입니다. 인간의 어떤 지고지순한 사랑도, 하물며 자녀에 대한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이든 친구를 위한 희생적 사랑이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이타적 사랑이든 피조물간의 사랑일 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견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놀라운 의미를 성탄절마다 거듭 곱씹어봐야 하고 결코 가벼운 오락과 유흥만으로 그날을 소비해서는 안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수 있는 걸까요. 입장을 바꿔서 만일 우리가 창조자라면 우리가 만든 피조물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가능할까요. 그런 사랑을 이해할 수는 있나요.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요한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8절)는 놀라운 선언을 통해 그 이유를 약간 짐작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다거나 그분의 특성 중 하나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을 떠나서 그분을 정의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그분과 사랑의 관계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반응은 그 초청을 거부하거나 맞사랑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사랑의 자발성에 따라 하나님이라도 우리에게 사랑을 강요하실 수 없습니다. 강제하는 순간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 큰 사랑을 거부하지 말고 손을 활짝 벌려 그분을 맞사랑하게 되기 바랍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이 사랑하시는 이웃과 세상을 사랑함으로 그 사실을 증명해야 하고(11~12절)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선언합니다(19~20절). 성탄절을 맞아 하나님과 더욱 깊은 사랑을 누리시고 이웃 사랑을 통해 그 사랑을 증명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 성육신으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을 사랑함으로 그 사랑을 증명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정민영 은퇴 선교사 (전 국제위클리프 부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