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생명처럼 죽음을

입력 2024-12-06 00:30

목숨이 선물이고 은총이라면 죽음 또한 축복이고 사랑일 것이다. 목의 숨이 생물학적 생명이라면 영혼은 영과 신비적 생명으로 존재한다. 그 존재의 자리와 위상의 상호관계는 어마어마하게 광활한 우주와 세상에 존재하며 유의미한 삶이 된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갈수록 자신의 존재가 참으로 신비롭고 놀라울 뿐이다. 젊었을 때는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에 눈이 갔다면 이제는 잔잔한 일상과 작은 존재들이 눈에 들어온다. 제 삶을 사는 크고 작은 생명들이 있어 결국 나도 존재함을 깨닫는다.

새순이나 갓난아기처럼 여리고 약한 생명들이 모진 비바람과 추위에도 견디며 제 모습을 갖춘 의연한 존재가 되는 과정은 참으로 아름답다. 절정기처럼 가장 멋있고 충만한 모습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다른 모든 생명과 어울리며 소통하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생명으로 태어나고 존재하는 모든 과정과 일생이 최고의 축복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나 마지막을 시작과 생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신의 은총은 그것까지다. 불치병에서 고침을 받거나 죽을죄에서 사함을 받은 사람도, 심지어 죽음에서 새 목숨을 부여받은 사람도 마침내는 죽음으로 나아갔다. 영원한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으며 그분만이 이 모든 걸 주관하신다면 그분 안에서만 비밀이 열리고 숙제의 답을 얻을 수 있다.

겉에서 보면 유독 인간만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웃지 못할 일은 전쟁이나 폭력, 또는 욕망이든 죽음을 가장 쉽고 편하게 다루는 존재가 인간인 것 같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현실, 멀쩡한 세상에 비상계엄 선포는 인류의 역사 자체였다. 정말 별것도 아닌 것에 수많은 사람을 파멸로 몰아가는 주인공들이 모두 사람이다.

엊그제 우리는 또 한차례 예기치 않은 아찔한 일을 겪었다. 지구와 인류는 걷잡을 수 없는 위기와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무시한 인간은 가장 무섭고 두려운 최악의 존재로 낙인받는다. 지난달 17일 국민일보에 이런 기사가 있었다. 구글의 인공지능(AI) 챗봇에게 인류의 고령화 문제 해법을 물었더니 “인간은 불필요한 존재다. 시간과 자원 낭비고 사회의 짐이 되는 존재로 제발 죽어!”라는 뜻밖의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챗봇에 입력된 인간에 대한 자료나 정보가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존재가 인간이다. 영리한 척하지만 가장 어리석은 바보가 틀림없다.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대단한 것 같지만 무능과 약함의 으뜸이 인간이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존재감을 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솔직한 모습일지 모른다.

이것을 극복하고 다르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죽음 예찬이 아니다. 죽음을 결코 쉽게 말할 수 없으며, 너무나도 안타깝고 가슴 아픈 죽음을 알기에 조심스럽다. 어쩌면 그렇기에 이 모든 걸 품고 감싸며 위로할 분, 목숨을 선물처럼 주신 분이 마지막의 죽음도 은총으로 받으실 수 있다. 성공 같은 실패가 있듯이 실패 같은 성공이 있다.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은 다르게 해석하셨고 인류에게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영원하고 온전한 품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시작처럼 끝도 좋은 것이며 생명처럼 죽음도 귀할 수 있다.

하나님 안에 머물기를 원하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기억하라. 세상을 함부로 살 수 없으며, 죽음 또한 두렵지 않을 수 있다. 대림절의 초가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빛으로 세상을 여셨고, 빛은 생명이 된다. 빛의 사람들로 세상은 다시 밝아지는 은혜가 있다.

백영기 쌍샘자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