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금촌고시원과 한국 교회

입력 2024-12-07 00:33

경기도 파주에서 금촌고시원을 운영하는 오윤환 원장을 만난 것은 눅진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4일이었다. 금촌고시원은 경제적 형편이 여의치 않은 이에겐 방값을 받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사시사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절절 끓는 더위 탓에 뻘뻘 땀을 흘리면서 찾아갔지만 고시원에 들어서자 선득한 한기부터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취재진을 쏘아보는 몇몇 투숙객의 시선은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저마다 뒤숭숭한 사연을 안고 살아왔기에 타인을 향한 눈빛이 너그러울 수 없겠거니 넘겨짚으며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특이한 것은 오 원장이 주일마다 투숙객들과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교회를 향한 따끔한 비판을 쏟아냈다. “고시원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해놓고 오지 않는 목회자가 많았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구제의 통로’가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투숙객들이 교회에 가면 누추한 행색 탓에 좋지 않은 시선을 받을 때가 많다”….

취재하면서 느낀 것은 한국 사회 변두리의 변두리에 고시원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언젠가부터 고시원은 쪽방을 구할 보증금도 없는 사람들이 찾는 최후의 보금자리가 됐다. 이렇듯 고시원이 한국 사회에서 띠는 의미와 금촌고시원 이야기, 고시원 선교에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하는 내용을 포개 기사를 썼다. 그리고 기사엔 오 원장의 소박한 소망도 담았다. 온갖 잡동사니가 나뒹구는 고시원 사무실을 얼마쯤 구색을 갖춘 예배당으로 바꾸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보도 이후 금촌고시원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최근 오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달라진 게 없노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오 원장으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금촌고시원을 아는 모든 이에게 보낸 듯한 단체 메시지였다.

“벼랑 끝에서 좌절하고 신음하며 이 추위에 노숙하며 굶주리고 생을 마감하려 할 때 하나님께 인도하여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따뜻한 손 내밀어주신 당신은 천사이십니다. 고맙습니다.”

금촌고시원을 다룬 기사는 지난 8월 24일자 국민일보 지면에 실렸는데, 이후에도 금촌고시원의 광경들은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신분증도 없이 고시원을 찾아와 투숙이 가능한지 묻던 노인, 고시원 곳곳에 걸린 십자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던 오 원장의 뒷모습…. 특히 일부 교회의 추문을 들었을 때, 교회가 과연 이래도 되는가 자문하게 될 때, 목회자들의 그릇된 말이나 행동을 마주할 때면 자연스럽게 금촌고시원과 그곳에서 주일마다 열릴 거룩한 예배를 떠올려보곤 했다.

이렇듯 그때의 소회를 자주 되새기게 됐던 것은 한국교회를 취재하면서 종종 무거운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사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평균대에 오른 체조 선수처럼 균형감을 유지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국민일보 종교국 기자로 일하면서 이런 감각을 꾸준히 지키기란 쉽지 않다. 일부 목회자들은 국민일보가 한국교회의 효자손이 되기만을 원할 뿐 손톱 밑 가시처럼 성가신 매체가 돼선 안 된다고 여긴다. 한 줌의 비판이 담긴 기사나 칼럼을 쓸 때도 습자지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교회를 향한 조심스러운 비판이 담긴 글을 쓰면 메일함에는 대번에 그 내용을 비난하는 편지가 도착하곤 한다. 그리고 그런 메일을 읽으며 기분이 한없이 까라질 때면 휴대전화 메모장에 저장해놓은, 칼럼니스트 김규항이 25년 전 썼던 ‘교회’라는 글을 찾아 읽게 된다.

“나는 며칠 후면 서른여덟이다. 나는 이제 나보다 다섯 살이 적어진 예수라는 청년의 삶을 담은 마가복음을 읽는다. 내가 1년에 한 번쯤 마음이라도 편해 보자고 청년의 손을 잡고 교회를 찾을 때 청년은 교회 입구에 다다라 내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내가 신도들에 파묻혀 한 시간가량의 공허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나오면 그 청년은 교회 담장 밑에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다.”

박지훈 미션탐사부 차장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