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에게 계수(計數)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 모세의 인생관이 함축적으로 담긴 시편 90편 속 본문 일부다. 이집트 왕자 출신으로 동족을 파라오에게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끈 민족의 성웅이었지만 말년의 그가 삶을 반추하며 떠올린 건 ‘수고와 슬픔’뿐이었다. 회한이 느껴지는 고백 뒤엔 인생의 ‘계수함’을 아는 지혜도 구한다. 인생은 덧없고 반드시 끝이 있으니, 그 종착역에 이르기까지 계속 삶의 의미를 깊이 깨닫도록 도와달라는 간구다. ‘죽음을 기억하라’란 라틴어 ‘메멘토 모리’와 맞닿은 모세의 고백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죽음은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준비케 하는 효과적 도구’라는 것이다.
고대인과 달리 현대인은 죽음으로 삶을 복기하는 걸 꺼린다. 집이 아닌 의료시설에서 장례를 치르면서 실생활에서 죽음을 마주하는 일이 확연히 준 것도 한몫했다. 첨단 의료 기술의 발달을 근거로 죽음의 과정인 노화를 극복 가능한 질병으로 보는 이들도 느는 추세다. 죽음을 기피하는 건 교회도 마찬가지다. 일각에선 ‘무병장수 아닌 죽음을 드러내놓고 기도하는 건 불신앙의 지표’라고 여기기도 한다.
총신대 신학대학원과 미국 미시오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림대 대학원에서 생사학(生死學) 박사 과정 중인 저자는 교회와 사회에 “이제 죽음을 편하게 이야기하자”고 권하려 이 책을 썼다. 본디 인간은 “죽음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한 걸음 더 나가 “의도적으로 죽음의 진실을 파헤칠 것”을 주문한다. “기독교의 핵심은 ‘생명’이며 ‘부활’이기에 죽음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원래 의도한 생명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이유다.
성경은 죽음의 기원을 인간의 타락에서 찾는다. 창조주의 명령을 거역한 인간이 죽음이란 형벌을 받았다는 내용이다.(창 2:17) 특기할 만한 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이 형벌이 바로 집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하나님은 “생명을 주는 내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있지 않을 것”이라며 “(이제)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로 이들의 날은 120년”이라고 선고한다.(창 6:3·새번역) 즉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생명(영)이 부재한 결과”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죽음을 단순히 ‘하나님의 형벌’로만 이해하는 건 아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렸다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기독교인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다만 이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소멸’로 여기는 스토아 철학적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 기독교인은 ‘영생’을 믿기에 죽음을 그저 ‘허무한 운명’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이다.
‘부활 소망’이 특징인 기독교의 죽음 인식에 따르면 자살은 죄일까. 저자는 “교회사에서 자살은 대체로 금지됐지만 사회·정치 상황에 따라 교회의 규제와 태도가 달랐다”고 설명한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살인죄를 논하는 십계명의 6번째 계명을 들어 자살을 “구원받을 수 없는 죄”라고 봤지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자의가 아닌 마귀의 힘에 장악돼 생긴 현상”으로 이해했다.
저자는 자살을 “교리가 아닌 ‘하나님의 생명 사랑’ 관점으로 이해할 것”을 권한다. “하나님이 준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건 그분 뜻에 어긋나는 행위”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에 분명히 명시되지 않은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로 자살자 유가족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일을 멈추자”고 말한다.
죽음 준비를 위한 실제적 조언도 전한다. 교회뿐 아니라 노인 복지 분야에서도 일했던 저자가 추천하는 건 ‘인생 서사(敍事) 작업’이다. “삶의 중요한 퍼즐 조각을 맞추며 그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때” 자신의 존재 목적과 여생의 목표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의사 조력 안락사 논의가 활발해진 우리 사회에서 ‘아름다운 마무리’란 무엇인지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종교 여부와 관계없이 참고할 만하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