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완전무결한 인간이자 학자로 칭송받는다. 한양대 교수로 고전학자인 저자는 “더 이상 무결점의 위인전은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산의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다산의 문집에는 빠져 있는 ‘금정일록(金井日錄)’, ‘죽란일기(竹欄日記)’, ‘규영일기(奎瀛日記)’, ‘함주일록(含珠日錄)’ 등 네 종이다. 1795년부터 1797년까지 다산이 33~35세였던 시절의 기록들이다. 다산의 생애에서 가장 격렬하고 긴장이 높았던 때로 천주교와 연관이 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천주교와 관련된 사학삼흉(邪學三凶)으로 지목해 처벌 논의와 상소 공방이 뜨거웠다.
다산은 천주교 문제에 관한 한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신앙을 버렸지만 완전히 떠나지 못했고, 임금을 사랑했지만 천주도 사랑했다. 저자는 “천주와 정조라는 두 하늘을 가슴에 품고 있었고, 둘은 공존할 수 없었다”며 “어느 하나 명백하게 포기하지 않은 채 공존할 수 없는 두 하늘을 품으려니 신념과 행동 사이에서 여러 불일치가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정조는 서학(천주교)을 버리고 유교 정론으로 돌아오라는 주문과 함께 아끼던 다산을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켰다. 다산은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피신시켰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금정지역은 천주교 교세가 가장 강한 지역이었다. 다산은 정조의 뜻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천주교 중간 리더인 김복성을 체포하고 이후 지도자 이존창을 직접 검거하는 등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
성호 이익을 기리기 위해 ‘서암강학기’를 정리했고, 퇴계 이황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도산사숙록’도 지었다. 천주교도 검거는 ‘전향 선언’이었고, 서암강학기 등의 저술은 일종의 ‘반성문’이었다.
남긴 일기 중 가장 많은 분량의 차지하는 금정일기는 이 시기의 기록이다. 다산의 일기는 내밀한 술회나 심경 고백이 거의 없고 건조한 문체로 사실만 나열한다. 필요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겨 훗날 증빙으로 삼기 위한 비망록 성격이 강하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저자는 이 시기 다산이 천주와 군주 사이에서 군주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은 분명하지만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다산은 부임 18일 만에 김복성을 체포한 뒤 바로 자백을 받아냈고, 다시 13일 뒤 김복성이 네 명의 천주교도를 데리고 와서 이들을 배교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다산은 이들을 투옥시키지 않고 훈방했다.
저자는 “교회 조직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김복성을 내세워 검거와 교화의 모양새만 갖추려 한 느낌마저 든다”고 말한다. 실제 다산의 온갖 노력에도 조정의 여론은 호전되지 않았다. 천주학을 버렸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했고, 정학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술수를 부리는 짓으로 받아들여졌다. 어찌보면 바른 평가였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은 만년에 다시 천주교로 돌아와 종부성사를 받고 세상을 떠났다. 다산은 사실 성호의 학문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도 않았고, 퇴계보다 율곡 이이의 학설에 기울어 있었다.
저자는 최근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국학계에선 다산이 천주교에 미쳤지만 자기 손으로 털고 나왔으니 다산과 천주교를 엮으려는 시도는 국학 모독이라는 시선이 있고, 천주교계에서는 다산이 배교자니까 관심 없다고 한다”며 “한쪽은 과장했고 한쪽은 은폐했으니 은폐와 과장 속 중간 지점의 진실에 접근하고 찾아내야 그 시대의 진실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그는 책을 마치면서도 “다산 일기의 속살을 읽은 것은 다산을 위선자로 몰고 가거나, 신앙에 대한 정체성 문제를 양단간에 갈라보려는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혔다. 그보다는 다산과 그 시대가 맞닥뜨렸던 거대한 모순을 읽고 싶어했다.
“다산의 엇갈리는 갈지자 행보는 그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징표가 아니라, 서학이라는 거대한 체계와 대면한 18세기 조선의 어정쩡한 스탠스를 보여준다. 이것은 개인의 도덕적 가치판단을 넘어선다는 생각이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