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순종·섬김… 하나님의 가치를 온전히 실천하며 살자

입력 2024-12-07 03:01
게티이미지뱅크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작은 어색함과 깊은 경외감이 주위를 감쌌다. 떼제(Taize) 공동체 구성원들의 짧은 기도문이 수차례 노래로 울려 퍼졌다. 노래를 기도로, 기도를 삶으로. 프랑스 부르고뉴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이 기도 방식은 수도원 영성의 진수를 담고 있다. 단순함 속에서 깊이를 찾아가는 기도 방식은 바쁜 현대인의 삶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개신교인 입장에서 수도원 영성은 낯설다. 혹시 로마가톨릭 영성을 추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교회가 배(船), 세상이 물(水)이라면 선박에 물이 들어오게 해선 안 된다. 수도원 시스템과 형식이 아니라 그 의미와 장점을 기독교 신앙에 적용할 수 있다면 수도원의 영성은 득이 될 수 있다. 국민일보는 개신교 차원에서 진행되는 수사 과정을 찾아 신앙생활의 적용점을 살폈다.

루터도 수사였다
김영한 기독교학술원 원장이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온누리교회 믿음홀에서 ‘성 테르툴리아누스의 영성’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온누리교회에선 교계에서 보기 드문 강의가 진행됐다. 이날 교회에서 열린 수업은 기독교학술원 영성학 수사과정. 강사로 나선 김영한 원장은 ‘성 테르툴리아누스(160~220)의 영성’을 주제로 강의했다. 강의 내용을 모두 받아 적기 어려울 정도로 수업 난이도는 높았다.

“비록 테르툴리아누스가 후기에 몬타누스주의(종말에 관한 희망과 임박한 재림 기대를 바탕으로 교회의 생활 규범을 극단적으로 쇄신하려고 한 2세기 중엽 몬타누스의 예언 운동)를 수용했으나 그의 초기 사상은 라틴 교회 사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줬습니다. 그가 초기에 정립한 사상은 이레니우스의 파라도시스(전승) 사상으로, 키프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등 서방교회 정통 교부(敎父)들에게 이어졌습니다.”

생경한 단어들에 당황하고 있는 기자와 달리,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수련생들은 강의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수련생들은 교파를 초월한 신학·선교학 박사 출신들로 강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고, 열띤 토론과 논찬을 이어가는 등 수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정경상 순복음예능교회 목사는 “신학이 개혁교회의 뿌리라면 영성학은 신학을 실천하고 체험하는 과정”이라며 “교부들과 종교개혁가들의 영성을 목회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 수강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기독교학술원은 약 7주 과정의 한 학기를 8학기(4년) 수료한 수련생에게 영성 수사 증서를 수여하고 있다. 수련생은 목회자와 선교사만 될 수 있고, 모든 강의는 신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는 전제로 진행된다. 학술원 수사 과정엔 그동안 100여명이 등록했으나 올해 기준 졸업생은 6명에 불과하다. 수사가 되는 길은 박사 수강생들에게도 쉽지만은 않았나 보다.

김 원장은 “영성학 수사 과정은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영성 사상을 연구하고 교부들이 이미 걸어간 영성의 전통을 공부하는 과정”이라며 “넓은 의미에서 교부들의 영성을 추구하면서 성결 순종 섬김을 실천하는 이들이 곧 수사”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교회가 따르는 마르틴 루터 등 종교개혁가들은 수도원 출신”이라며 “종교개혁 정신은 교부들의 신앙에서 나왔다. 교부들의 신앙을 탐구하는 건 기독교의 원천을 길어내는 일과 같다”고 강조했다.

독일 드레스덴의 마르틴 루터 동상(왼쪽)과 맨발의 성자 이현필.

다리 밑에서 시작된 수도 영성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수도공동체는 ‘동광원’으로 알려져 있다. 맨발의 성자 이현필(1913~1964) 선생이 1950년 광주에 세운 동광원은 보육원과 수도공동체의 기능을 병행하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수도 영성’을 따랐다. 한국샬렘영성훈련원 원장을 지낸 김오성씨는 ‘기독교사상’에 연재한 ‘기독교 수도공동체 기행’이란 글에서 이현필 선생과 그 제자들의 삶을 이렇게 설명했다. “광주 양림동 다리 밑에서 거지 생활을 하면서 찬송으로 새벽을 열고 낮에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음식들을 구걸했다고 한다. 시장터에서 주워온 채소 잎을 끓여 나눠 먹는 탁발 행위를 이어갔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2009년엔 한국 기독 교계에 처음으로 독신 남성 수도회가 발족했다. ‘밥퍼 목사’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는 다일형제수도회를 설립했는데 당시 남성 2명이 수사가 됐다. 두 수사는 다일공동체에 입회해 ‘아름다운 세상 찾기’ ‘작은 예수로 살기’ ‘하나님과 동행하기’ 3단계 수련을 거친 뒤 수사가 됐다. 최 목사는 지난 3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현재 다일형제수도회에서 수사 4명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떼제공동체의 공동기도 모습. 떼제공동체 제공

현대 기독교에서 수도원 영성을 대표하는 이름 중 하나는 바로 떼제다. 프랑스 동부의 시골 작은 마을에 있는 떼제는 1940년 개신교 출신 로제(Roger Schutz) 수사가 세운 세계 최초의 개신교 남성 수도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숨겨주고, 전쟁 후에는 독일군 포로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며 환대의 영성을 실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떼제에선 세계 35개국 출신 90여명의 수사가 경건과 소박한 삶,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인 신한열 수사는 이곳에서 2020년까지 32년간 생활했다.

신 수사는 수도원 영성을 둘러싼 젊은 세대의 관심이 식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떼제를 찾는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기도와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환대에 있다”며 “여름이면 떼제를 방문하는 청년들이 매주 5000명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청년들은 짧은 기도문을 반복해 부르는 ‘떼제의 기도’를 통해 묵상의 깊이를 경험한다.

다시 수도원 영성으로
한국샬렘영성훈련원 영성 교육 현장. 한국샬렘영성훈련원 제공

수사가 돼야만 수도원 영성을 추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한국교회에서 수도원 영성은 새로운 길을 찾는 이들에게 영적 쉼과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샬렘영성훈련원(원장 김홍일 신부)이 대표적이다. 김홍일 원장은 “수도원 영성은 기독교 전통에 녹아 있는 영성”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초기 교회에서는 교구와 수도회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전통 안에서 공존했다”며 “수도원 영성은 단지 수도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의 중요한 일부”라고 설명했다. 그는 개신교가 종교개혁 과정에서 교회의 전통적 영성을 간과한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며 ‘목욕물을 버릴 때 아이까지 버렸다’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비유를 인용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가 회복하려는 것은 기독교 전통 속에 숨겨진 영성”이라고 강조했다.

수사는 청빈(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린 삶), 정결(깨끗하고 깔끔한 삶), 순명(자유의지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서약하고 독신으로 수도 생활을 이어가는 남성을 일컫는다. 하지만 수사라는 호칭은 아직 개신교에선 낯설어 보인다. 개신교가 종교개혁 과정에서 수도원 전통을 멀리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직 이름은 낯설지만 수도원 영성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여전히 개신교 신앙의 전통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수사가 되는 건 쉽지 않지만 수사의 삶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거룩함과 환대, 단순함을 추구할 때 복잡한 삶 속에서도 수도원 영성을 실천할 수 있다.

수도원 영성은 교회의 문턱도 낮출 수 있다. 한국샬렘영성훈련원 프로그램디렉터인 이진권 목사는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추락하는 이유는 결국 복음적 가치를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데 있다”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삶으로 온전히 실천하는 삶이 수사의 삶”이라고 강조했다. 최일도 목사 역시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 수도원 영성은 가장 필요한 신앙 운동이요, 고귀한 신앙의 몸부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이현성 손동준 기자 sag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