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사람에게도 종이 있을까?

입력 2024-12-07 00:31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이발사가 자신의 목을 벨까봐 면도를 맡기지 않았고, 혹여 불이 날까 두려워 2층 방에서는 잠을 자지 않았다.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워가며 매물을 살펴보는 요즘 화재 시 탈출의 용이성을 고려해 2층 이하의 집만 보는 나로서는 그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와의 결이 이다지도 비슷하다 보니 쇼펜하우어가 전한 고슴도치 우화 역시 내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어느 겨울날 온기가 필요했던 고슴도치 몇 마리가 서로의 가시에 찔려가며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단다. 그는 말했다. 타인에게서 따스함을 얻고자 한다면 그가 주는 상처는 감당해야 한다고 말이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사람에게 찔리며 살아왔던가. 그동안 경험을 발판 삼아 웬만해서는 타인에게 곁을 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따금 깊은 상처를 받곤 한다. 죄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 일한 죄밖에 없는 나에게 비난을 퍼붓는 사람, 솔직함이 장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알고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나를 속인 사람,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빌려 가더니만 깜깜무소식인 사람까지.

그들을 이해해 보려 갖은 애를 써 봐도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는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사람 속이 얼마나 시꺼머면 그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종내에는 인류애를 잃고야 마는 것이다.

타인으로부터의 따스함이 다 무엇이더냐. 따끈한 방바닥에 등을 지지며 을씨년스러운 나날을 버티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육개장을 먹으러 가자는 연락이 왔다. 방바닥이 아무리 따끈하기로서니 텅 빈 뱃속까지 데워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차를 끌고 갈 테니 빨리 준비하라는 친구의 말에 서둘러 겉옷을 꿰어 입었다. 우이동을 향해 차를 모는 친구에게 “얼마나 대단한 걸 먹겠다고 거기까지 가?” 하며 투덜댄 것은 잠시였다.

곧이어 도착한 육개장집 곁으로 계곡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고서 감탄을 금치 못했으니 말이다. 뜨끈한 육개장과, 코끝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과, 귓가를 졸졸 간질이는 계곡물 소리는 환상적인 삼합을 이루었다.

“내가 말이야. 온갖 군데 다 다녀봤어도 말이야. 여기처럼 맛있는 데는 또 못 봤다니까.”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술기운이 잔뜩 올라 얼굴이 벌게진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말이야. 딱 한 병만 더 마시자, 한 병만 더!” 할아버지는 이제 그만 일어나자는 일행의 짜증에 아랑곳하지 않고 안주 삼을 두부조림을 주방에서 얻어왔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친구가 “어째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으냐” 하며 배슬배슬 웃더니만 빈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도대체 무어라 아양을 떨었는지 모르겠으나 두부조림을 수북이 받아온 모습에 내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두부조림을 먹는 친구와 할아버지의 모습이 근경과 원경으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부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아 있었다. 어쩜, 모자를 삐뚜름하게 쓴 껄렁한 겉모습은 물론 능청스러운 행동양식까지 흡사할 수 있을까. 나는 사람에게도 강아지처럼 종이 있는 거 아니냐며, 그렇지 않고서야 너와 저 할아버지가 이다지도 비슷할 순 없다며, 나더러 그렇게 행동하라고 하는 건 벌칙 수행과 다름없다며 킥킥 웃었다. 친구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나를 별종 보듯 바라봤다. 그래, 다른 갈래의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 저마다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 아닐까.

그때 “쓰읍!” 하는 소리와 함께 계곡 쪽으로 투명한 물줄기가 뻗어나갔다. 한 병만 더 마시자는 할아버지의 주정을 참을 수 없었던 일행이 잔에 남아 있던 소주를 뿌려버린 것이다. “아니, 아까운 술을 왜 버리고 그래. 히히, 알았어. 안 마셔, 안 마시면 되잖아!”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소리 낮춰 말했다. “봐, 강한 자 앞에서 꼬리를 내리는 모습도 너랑 똑같아.” 나의 말을 부인할 수 없다는 듯 친구도 따라 웃었다.

따스해진 배를 문지르며 식당을 나섰다. 할아버지와 그의 일행도 우리의 뒤를 따라 나왔다. “잘 먹었네.” “다음에 봐.”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갈래의 길로 걸어갔다.

이주윤 작가